여름의 밤은 파티 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그 말을 한 이가 누구든 간에 그는 지금 엄청나게 저주를 받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살아 있다면 왠지 자신의 귀가 가려움을 느끼고 낑낑대고 있을 것이고 혹여 죽었다고 해도 귀가 있을 자리인 두개골의 옆이 가려울 정도의 엄청난 저주였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저주는 바로 가르시아 가문의 사용인인 셰릴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물론 여름의 밤은 날파리 등을 제외했을 때 실제로 파티를 열기 좋은 계절이었다. 달빛이 살짝 내려앉아 더 신비롭고 생명력 넘쳐 보이는 신록의 푸르름. 그리고 낮에 피부를 할퀴듯이 달려들어 사람들의 진을 빼던 열기를 쫓아주며 상쾌함을 안겨주는 시원한 밤바람. 그런 것들을 다 종합해 보았을 때 밤에 여는 파티는 여름이 제격이었다. 셰릴이 이토록 화를 내는 이유는 첫째, 파티란 준비하는 데에 많은 손길과 시간이 필요하므로 사용인들은 낮에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있겠고 둘째로는 셰릴이 주방, 그것도 오븐 앞에서 일하는 빵 굽는 아가씨라는 것이겠다. 안 그래도 더운 여름에 시원한 바람 하나 가까이 오지 못하는 오븐 앞에서 빵만 구워대고 있으려니 짜증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아아, 대체 반죽은 언제 다 떨어지는 건데? 짜증나, 바우어는 어디 갔어? 적당히 쉬고 교대해주지 않고?!”


짜증이 잔뜩 어린 그녀의 목소리가 주방 안에 짜르랑하니 울렸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셰릴은 꽤나 예쁘장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뒤를 돌았다. 그녀의 뒤에는 단정하게 생긴, 모노클이 꽤나 잘 어울리는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싱긋이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셰릴은 기겁을 하고 놀라며 급하게 허리를 깊숙하게 숙였다.


“지, 집사장님!”

“셰릴, 수고가 많네요. 조금만 더 수고해주시겠어요?”


집사장이라 불린 그 사내의 이름은 모르테. 가르시아 가문의 집사로써 이 파티를 총괄하고 있었다. 그러니 짜증을 내다가 그에게 걸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셰릴이 당혹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모르테는 주방을 한 번 둘러보고 입 꼬리에 미소를 건 채 다시 주방 밖으로 걸어나갔다. 평소라면 셰릴에게 꾸중을 한바탕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는 발걸음을 조금 재게 놀려 계단을 걸어 올라가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된 흰 문 앞에 섰다. 눈송이를 형상화하기라도 한 것인지 문에 새겨진 무늬는 참으로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모르테는 장갑을 낀 손으로 문을 두어 번 가볍게 노크하고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이내 문 안쪽에서 가느다랗고 청명한 미성이 그에게 들어오라 허락했고, 모르테는 그제야 문을 열고 그 안에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좋은 오후입니다, 아가씨. 저녁이면 파티가 시작되는데 준비는 다 하셨는지요?”


모르테는 정중한 태도로, 제 가슴에 손을 가벼이 얹은 채 허리를 깊숙하게 숙여 인사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방 안쪽에 서 있던, 연하늘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소녀가 제 연하늘빛 눈동자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모르테를 바라보던 그 아가씨의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준비는 다 했어, 모르테야 말로 파티 준비는 착실히 다 되어가고 있는 거야?”

“물론입니다, 디오네 아가씨.”


모르테가 말한 대로, 그녀의 이름은 디오네였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디오네 폰 가르시아. 가르시아 가문의 가주인 에레부스 폰 가르시아의 막내딸이자, 귀여운 고명딸이었다. 

아름다운 꽃에는 벌레가 꼬인다고 했던가,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다고 했던가. 모르테는 제 앞의 아가씨를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이 아가씨가 납치당했던 것이 얼마 전의 일이었던가. 아름다운 백합꽃, 한 떨기의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여린 백합꽃은 그 날 이후로 얼음으로 조각된 꽃이 되어 돌아왔다. 어쩌면 그 전보다 더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가시를 단단히 세우고 제 곁에 다가오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매섭게 위협하여 쫓아버리는 꽃이 되어버린 것이다. 뭐, 그 가시마저 다 품어버릴 수 있는 자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모르테는 그 자의 얼굴을 생각하곤 입 꼬리를 비틀어 올려 작게 비웃는 듯한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디오네는 그런 모르테의 미소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가벼이 모른 척을 하며 넘어갔다. 

디오네의 방문을 누군가 가볍게 두드렸다. 가볍지만 힘이 실려 묵직한 소리를 내는 노크, 그리고 칼집이 내는 나직한 잘그락 소리. 아아, 그 자다. 모르테의 입가에 매달려있던 작은 미소가 더 짙어졌다. 역시 양반은 못 되는군, 모르테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선 문 쪽을 바라보았다.


“들어오시죠. 클레비스 소공작.”

“왜 네 녀석이 여기 있는거야? 나는 디오네 양을 보러 온건데.”


툴툴거리며 짙은 남빛 머리의 기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훤칠한 키로 뭇 여성들을 설레게 하는 모르테보다도 더 크고 훤칠한 키와 탄탄한 몸매. 사교계에서 화제가 될만한 근사한 사내였다. 하지만 그가 이런 저런 파티에 자주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에게 이미 아름다운 피앙세, 즉 약혼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 약혼녀의 이름은 디오네 폰 가르시아. 그렇다, 그는 방금 제 약혼녀의 방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것이다. 그때까지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디오네의 입꼬리가 살며시 말려올라갔다. 많이 티는 나지 않더라도 그녀 역시 헬이 찾아온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헬은 그런 그녀를 보고 활짝 웃으면서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깊게 허리숙여 인사했다. 디오네 역시 제 치맛자락을 살며시 잡은 채 허리를 숙여 우아하게 인사했다. 헬은 이내 허리를 세우고 디오네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쥔 채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디오네의 뺨에 은은한 벚꽃이 피어났다. 한 쌍의 사랑스러운 연인이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연인이었기에, 누가 보더라도 자연스레 미소를 띄울 것만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는 이가 있었다. 그는 당연히 이 방 안에 서 있는 모르테였다. 그는 가벼이 헛기침을 하여 디오네와 헬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도록 하였다. 디오네와 헬이 자신을 바라보자 모르테는 눈을 휘어 싱긋 웃으며 헬이 디오네의 손을 놓도록 하였다. 헬이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모르테는 웃음으로 그 표정을 묵살해버렸다.


“아가씨는 아직 치장이 덜 끝나셨습니다. 클레비스 소공작. 아무리 피앙세라 하더라도 파티를 준비중인 숙녀의 방에 들어오는 것은 꽤나 실례지요. 그렇지 않나요?”

“제기랄. 처음부터 끝까지 맘에 드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녀석이야, 너란 녀석은. 너랑 소꿉친구만 아니었어도 당장 베어버렸을 텐데.”

“그쪽이야 말로 저와 친구라는 것을 감사히 여기시죠. 그렇지 않았으면 이 집 안에 단 한발도 들여놓지 못했을 테니.”


헬과 모르테는 서로를 향해 활짝 웃으며 험악한 말들을 쏟아내었다. 디오네는 그 모습이 재미라도 있는 것인지 그 둘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툼은 금세 끝났는데, 모르테가 헬을 방 밖으로 몰아낸 탓이었다. 헬은 혹여 디오네의 귀에 좋지 않은 말들이 흘러들어갈까봐 입 안으로만 온갖 욕설을 중얼거리며 일단은 디오네의 방 앞을 떠났다. 그래도 몇 시간 후면 열릴 파티에서의 디오네가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하곤 기분이라도 갑자기 좋아진걸까 방을 떠나 시간을 때울 곳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꽤나 가벼웠다.

헬이 떠난 이후-엄밀히 말하면 모르테가 일방적으로 헬을 내쫓은 이후-디오네의 모르테가 시녀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대로 옷을 갈아입고, 장신구로 치장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르테는 디오네의 집사. 그녀의 행복을 최우선에 두고 행동하는 이다. 방금 헬이 왔을 때의 복장을 보고 그가 파티 때는 어떤 복장을 차려입고 올지 추론한 그는 그에 맞게, 헬과 디오네가 완벽한 한 쌍으로 보일 수 있도록 디오네의 옷차림을 조율하고 있었다. 디오네가 헬과 함께 있는 것을 행복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헬 폰 클레비스 소공작이 입장하십니다!”


문지기가 연회장 안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연회장 안의 사람들 사이로 웅성이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헬 폰 클레비스. 남자들 중에서 사교계의 꽃을 뽑는 투표가 있다면 그는 분명히 선택지에 있을 것이고, 그가 꽃으로 뽑힐 확률도 높은 남자였다. 약혼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사방에서 러브콜을 받는 남자. 심지어 공주님들마저도 관심을 가지는 남자였다. 특유의 상냥함과 정중함으로 여성들의 인기를 휘어잡고 있지만, 남자들이 그를 적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정중한 태도로 일관했으며, 약한 것도 아니었다. 당당히 실력만으로 왕실 기사단의 행동대장 자리를 꿰찰 정도였으니 충분히 강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웅성거림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헬은 그런 웅성거림을 뚫고 정면으로 당당히 걸어나갔다. 가르시아 가문에서 연 파티이니만큼 연회장의 앞에는 가르시아 가문의 수장인 에레부스 폰 가르시아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딸인 디오네 폰 가르시아가 서 있었다. 에레부스의 아들이자 디오네의 오빠들 역시 화려하고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미는 헬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헬의 눈에는 오로지 디오네만이 들어오고 있었으며, 디오네 외의 존재는 눈에 들어온다고 해도 그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디오네의 앞으로 걸어간 헬은 그녀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많은 여성들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나왔다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것이다. 


“디오네, 나의 여왕님. 제게 오늘 하루, 당신을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연회장 안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기는 했지만, 헬의 그 말은 연회장 전체로 울려퍼져,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디오네는 그때까지 딱딱하게 굳어, 마치 얼어버린 것만 같던 표정을 풀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부드럽게 거머쥐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와 헬이 내민 손 위에 제 손을 살며시 얹었다.


“잘 부탁해요, 헬. 오늘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내 손은 당신의 것이니까요.”


헬은 싱긋 웃으며 몸을 일으켜, 디오네를 에스코트했다. 디오네의 아버지인 에레부스는 만면에 가득한 미소를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 납치 사건 이후로 디오네의 미소를 보는 것은 손가락에 꼽을 만한 일이었으니 어지간히 기뻤으리라. 헬은 디오네와 함께 걸으며 그녀의 귓가에 다정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연신 속삭이고 있었다.


“오늘 생일 축하해요, 디오네 양. 이런 특별한 자리에 초대되어, 당신을 에스코트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기쁠 수는 없을거예요.”

“헬, 당신 말고 내 손을 잡을 수 있는 남자는 없어요.”


디오네의 말은 짧고 간결했지만 헬은 그 아래에서 애정을 조금 발견할 수 있었기에 그의 미소는 더 깊어졌다. 서로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연인들의 속삭임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오직 서로만을 향한 속삭임, 서로만을 향한 마음. 해가 지고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도 그 둘만은 환하게 빛을 발하는 듯 했다.

 자신의 머리색과 비슷한 남빛의 제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헬과 진한 남빛의 공단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은 디오네는 그 누가 보아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서로를 향한 미소와 작은 새들의 노래마냥 재잘거리는 듯한 속삭임. 헬이 무릎을 꿇을 때 약간의 질투로 디오네를 시기하듯이 바라보면 귀족 영애들마저도 그 달콤함에 물들게 할 만한 달콤함이 그들에게서 전해져오고 있었다.


“무언가 마시고 싶은 거라도 있나요, 디오네?”

“저는 헬이 마시는 거라면 무엇이든 좋아요.”


디오네는 약간 부끄러운 듯 양 뺨에 낯꽃을 피워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헬은 그런 디오네의 모습마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싱긋이 웃으며 그녀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금방 다녀올테니, 나의 여왕님. 부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말아줘요.”


디오네는 고개를 새침하게 돌렸지만, 미미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미처 감추지 못한 올라간 입꼬리를 발견한 헬은 싱긋 웃으며 음료를 들고 있는 웨이터나, 음료가 놓인 테이블을 찾기 위해 걸어갔다. 디오네는 그런 헬을 기다리며 테라스 근처에 서서 가만히 창 밖으로 펼쳐지는 무수한 별의 회화를 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밤하늘에는 쏟아질 것마냥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검푸른 밤하늘이란 천에 진주로 하나하나 수를 놓던 천사가 수놓던 진주들을 전부 천 위에 실수로 쏟아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밤하늘은 영롱한 별들로 쉴새없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밤하늘을 바라보는 디오네의 눈 역시 영롱하게 빛났다. 연하늘빛 눈동자에 진남빛의 하늘이 비쳐, 마치 진남빛 공단 위에 놓인 오팔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눈동자에 홀리기라도 한걸까, 그 근처에서 제 친구들과 지절거리며 와인을 마시던 젊은 남자가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그 즉시 밤하늘을 향해있던 디오네의 눈동자는 지상으로 내려와서 그 남자를 향했다. 방금까지 아름답고 영롱하게 빛나던 눈망울에는 자신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에 대한 분노와 짜증, 그리고 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샘솟아 나오는 두려움으로 가득찼다. 남자는 그런 것들을 읽지 못한 것인지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디오네에게 한 발 더 다가가서는,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마드모아젤 디오네 폰 가르시아. 저는 라이네르 왕국에서 온 대사의 아들인 에른스트 드 라인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 그대를 만나다니, 아무래도 오늘은 저의 날인가 보군요. 행운의 여신인-“

“…물러나요.”


자신을 에른스트라고 소개한 금발머리 남자의 말을 끊은 것은 디오네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서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시선은 아래로 떨군 채, 디오네는 입술을 악물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쪽과 이야기하기 싫으니까.”

“아아, 이거 서운하군요. 제게는 단 한번의 기회도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마드모아젤 같은 미인을 남자 혼자만 독점하는 건 너무나도 큰 손해인걸-“

“이야기 하기 싫다고!”


결국 디오네는 참지 못하고 날카롭게 소리질러버렸다. 그녀의 비명 같은 소리가 짜랑, 하고 울려 넓은 연회장 전체에 울려퍼졌다. 헬 역시 그 소리를 들었다. 그는 디오네가 있는 곳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에른스트는 멍하게 디오네를 바라보았다. 디오네는 에른스트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눈망울에는 눈물이 잔뜩 고여, 금방이라도 떨어질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제 온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것은 헬보다 디오네의 세 오빠들이었다. 그들은 소중한 여동생의 눈물을 보자마자 에른스트를 끌어내기 위해 움직였으나, 디오네의 곁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헬이었다. 헬의 두 눈에는 불이 이는 듯 했다. 마치 제 새끼를 해한 사냥꾼을 발견한 어미 호랑이의 눈마냥 거센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다. 헬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검을 뺴내들었다.


“감히, 감히 누구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한 것이냐. 네가 누구든, 무엇하는 놈이든 상관 없다. 디오네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한 이상, 죽음으로 보답하게 할 것이다!”


 그 누구도 비명을 지르지 않을 정도로 다들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헬은 이를 악문채 빠르게 에른스트에게 달려들었다. 에른스트는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헬. 아가씨의 생일은 제대로 챙긴거냐?”


그 상황과 전혀 맞지 않은, 생뚱맞은 말이었다. 헬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르테였다. 평소처럼 깔끔한 정장 차림에 모노클과 장갑까지 완벽한 모습의 그는 디오네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아가씨의 약혼자는 무모하군요. 허나 아가씨의 명예를 위해 저리 칼을 빼든 것이니 너무 노여워하지 말아주십시오.”


디오네에게 손수건을 건넨 그는 헬에게 다가왔다. 그의 입가에 삐딱한 미소가 걸렸다.


“오, 멍청한 내 친구. 이곳은 연무장이 아니야. 술이라도 마신건가?”


디오네는 그제야 검을 본 것인지 살짝 흠칫했다. 그것을 본 헬은 당장 검을 검집에 넣은 채 제 종자에게 검집을 통째로 맡기고선 당장 디오네 곁으로 다가가, 모르테가 건넨 손수건은 제 허리띠에 쑤셔넣고, 제 손수건으로 디오네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를 달랬다. 디오네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떨리는 손으로 헬을 꼭 붙잡았다. 모르테는 그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가, 미소를 제 얼굴에서 싹 지운채 에른스트를 향했다.


“이 무슨 무례인지.”

“그, 그렇게 생각하죠, 당신도. 저 자는 방금 날 위협-“

“클레비스 소공작을 칭한 말이 아닙니다. 에른스트 드 라인델. 아니, 에른스트 라인델. 남의 약혼자에게 함부로 수작을 거는 것도 모자라서 위협까지 하다니, 내가 이 자리에서 당신을 베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막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 아가씨가 싫어하실 것 같아 그런 것이지. 그러니 당장 이곳에서 나가시죠. 끌어내라고 명령하기 전에.”


모르테의 어조는 정중했지만 무례했다. 예법에 어긋난 것은 없었지만 상대를 깔아뭉개는 어조. 에른스트는 잠시 이를 갈다가 연회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모르테는 그제야 좌중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질투가 많은 연인이군요, 저희 가문 아가씨의 피앙세는. 이런, 음식들이 식고 술은 미지근해지는군요. 이 시간은 지나가면 다신 오지 않는답니다. 음악을 듣고 선율에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밤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다시 재잘거리며 생기발랄하게 떠들었다. 디오네는 헬의 손을 꼭 잡고 있었고, 헬은 그녀에게 연신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그녀의 곁을 비워서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그래도 행복한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르테는 행복해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다시 제 눈에 담고 연회장 한켠으로 가서 섰다. 달과 별이 디오네의 생일을 맞아, 헬과 디오네를 축복하는 듯 밝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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