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샹 님께 드리는 문장 




나는 친절해진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슬프게 할까봐 조금 조심스러워졌을 뿐이다. 




#당신께_드리는_문장 https://kr.shindanmaker.com/829910 


-


 인간의 것보다는 짐승의 것을 더 닮은 별난 눈. 말투며 외양에서 배어나오는 흉노족의 증거. 제 병사들을 제하면, 황궁 내에서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흉노일 것이다. 샨유는 담담하게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흰자위가 있어야 할 곳에 진남색만이 가득했다. 그 진남색 가운데의 노란 눈동자는, 형형한 빛을 띄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중국인이 아니라 흉노였으니까. 그가 중국에서 얼마나 살았건, 그는 결코 중국인이 될 수 없었다. 모두들 그를 흉노라고 말하며 선을 그었으니, 그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는 중국인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다른 존재는, 언제나 반감을 일으키고 적을 만들게 되는 법이다.


군대를 이끌면서 적을 만들게 되는 것이 그렇게 신기할 일은 아니었고 그렇게 문제가 될 일도 아니었지만, 그 적이 제가 이끄는 이들 내에 생긴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샨유는 언제나 엄격했고, 무뚝뚝했으며, 결코 친절하거나 상냥한 모습을 내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냉정하고, 엄격한 귀신 장군. 군대가 힘과 지위의 권력관계로 돌아가는 집단이기에 가능한 모습이리라.


하지만 이런 모습도 통하지 않는 상대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최근에 생긴 제자이자 지킬 주인이겠다. 샨유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곧 그녀를 만나러 가야 할 시간이다. 오늘은 또 어떤 행동으로 저를 경악시킬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방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제 부관인 웨이이리라. 샨유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샨유 대장군님, 황태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다."


그는 짤막하게 대답하곤, 거울 속의 제 눈동자를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 누구라도 이 눈을 보면 즉시 시선을 피해왔다. 살아오는 내내 그러했건만, 이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저로써도 곤란한 일이다.


"5분 늦으셨어요, 샨유 대장군."


장난치듯이 말하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하다. 샨유는 별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보였다. 고개를 서서히 들어, 제 앞에 선 여인을 응시하자면, 웃음기 가득한 흰 얼굴이 눈 가득히 어린다. 평소에는 높이 틀어올리고 있을 검은 머리카락을 묶어내리고, 평소의 화려한 한푸가 아닌, 움직이기 편한 옷을-바지? 샨유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이 바지를 어디서 얻어왔을까?-간단히 차려입고 있었다. 제 소문을 듣지 못했을리는 없다. 그녀는 뭐니뭐니해도 황제의 첫 딸이자, 후에 황실을 물려받을 황태녀니까. 명에 불복한 귀족의 아들을 호되게 벌해 결국 실신해서 집에 실려가게 한 일이나, 군법을 어긴 이들이라면 누구든 자비없이 벌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이렇게 저를 편히 대할 수 있다니, 샨유로써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준비하는 동안 시간이 걸려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황태녀 전하."


"괜찮아요. 질책하려고 한 소리는 아니니까요."


라며 가볍게 웃는 모습에서는 정말로 저를 꺼리는 기색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까지가 본심인가. 샨유는 언제나 그녀 앞에만 서면 이런저런 상념이 많아졌다. 그녀가 제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그로써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황제의 딸이었고, 곧 중국의 황제가 될 몸이었다. 즉, 그녀야말로 중국인 중의 중국인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언제나 저는, 중국인이 될 수 없었고. 샨유의 눈이 한층 더 깊어졌다.


"오늘의 대장군은 고민이 있으신 모양이네요."


어느새 숙인 고개를 들면, 붉은 색이 어렴풋하게 어린 갈색 눈동자가 저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제 속에 있는 것까지 전부 읽어내는 것 같아, 샨유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입가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별 것 아닙니다. 그저... 이 대장군과 저의 그, 규율 불복에 대한 기준이나, 처벌에 대한 것이 조금 다른 것 같아."


생각하고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저는 제가 옳다고 굳게 믿으니 결코 바꿀 일이 없겠지만, 다른 부하들이 이러한 이야기가 나돈다며 말하던 것을 들어두길 잘했다 싶었다. 황태녀 바로 앞에서 당신이 제 고민이라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분명히 그렇구나, 하며 가볍게 넘기겠지. 샨유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짝 흐트러져 있던 제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러면, 바로 수업에 들어가도..."


"그, 처벌 문제는 진 씨 가문의 둘째에 대한 일이예요? 그거라면 나는 샨유 대장군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샨유 대장군이 고민하지 않아도 될 문제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원칙에 맞춘 정당한 처벌이었고, 그가 그렇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던 것도 아니었잖아요?"


말이 끊겼다. 샨유는 저도 모르게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상 외였다. 그녀는 제법 진지한 눈을 하고, 제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또렷하게 제 의견을 밝혔다. 갈색 눈동자가 또렷했다.


"하지만... 가끔은 심하다는 생각도 조금은 해요. 특히 일반 병사들은 가문의 유일한 남자인 경우가 있는데, 그들을 옥에 가둬 쇠약하게 하면 그 집이 힘들어지는 것과 같은 의미니까요. 음, 사실, 묶어서 밖에 내버려두는 것을 보는 것도 유쾌한 기분은 아니고... 아! 그렇다고 이 대장군님처럼 하라는 의미는 아니예요. 음, 애초에 이건 법을 고쳐야 하는 부분일까..."


이것저것 고민한 티가 나는 말이다. 저를 생각하는 것일까, 혹시라도 저를 비방하는 것처럼 들릴까 단어를 고르고, 말을 하면서도 마구 생각을 하는 것이 눈에 선하다. 정말로 의외인 것에, 샨유는 말까지 잃은 채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 아. 어쨌든, 어쨌든요. 저는 황태녀로써 샨유 대장군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한 개인으로써는 어떻습니까."


생각하기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노란 눈동자가 갈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갈색 눈동자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어리더니, 이내 웃음기가 동글게 어린다.


"개인으로써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음, 굳이 말하자면 그 때문에 샨유 대장군이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사거나 하는 건 조금 슬플까 싶긴 하지만요."


그 말은 왜인지 마음속에 콕콕, 바늘로 새겨지듯이 새겨졌다. 쑥스럽다는 듯이 웃어보이는 얼굴이 환해서, 밤하늘 하늘에 오롯하게 떠오른 달을 보는 듯 했다. 온통 어둡던 사위를 비추는 그런 달 같아서 샨유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대장군님. 요즘 평소와 조금 다르십니다."


부관인 웨이가 가만히 눈치를 보며 입을 연다. 확실히 다르기야 하겠지. 평소라면 이러한 말도 걸지 못했을 테니까. 네 신경쓸 바 없다고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숨을 가벼이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가?"


"아니, 그건 아닙니다만... 장군님께서 친절해지셨다는 이야기가 조금 들려와서."


"딱히 그런 것은 아니다."


짤막하게 말을 끊었다. 그래, 그런 것이 아니다. 방 밖으로 나서 걸으며 지나가는 이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이들이 반, 머쓱해하며 마주 인사하는 이들이 반이다. 아직은 갈 길이 멀었나 싶다. 하늘로 시선을 올리면 어슴푸레한 짙푸른색의 하늘이 보인다. 아직 달이 떠오르지는 않았나, 아니면 그저 제가 못 찾는 것인가. 달빛을 좇는 눈길에 웃음기가 어렴풋하게 어린다. 시간이 지나고 사방이 어두워져 제가 홀로 되면, 그 때에는 다시 달빛이 제 창가에 와 주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샨유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 옮겼다.


'드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체가벌떡! 님 드림 수위 커미션  (0) 2018.12.26
다락방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9.15
페이지님 드림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음식합작 [오다세츠]  (0) 2018.07.18
음식합작 [그로레온]  (0) 2018.07.18

아, 평소같은 날이다. 수영부의 주장인 타치바나 마코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빙긋이 웃어보였다. 햇살이 기분좋게 내리쬐어서는 수면이 찬란할 정도로 빛을 내었다. 그리고 그 빛을 가르는 하루 쨩. 음, 모든 게 다 평소처럼이야. 하루 쨩의 시선 끝에는 언제나처럼 사야 쨩이... 어라, 마코토의 눈썹이 살짝 이그러졌다. 이건 평소같지 않은데.

평소라면 하루카를 한 순간이라도 제 시야에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열렬하게 바라보고 있을 그녀였다. 시선이 마주칠때면 미소 띈 얼굴에 더더욱 환한 웃음을 피워내고 손을 흔들어 인사했을텐데, 오늘은 먹구름이라도 낀 듯이 미간을 찌푸린 채 팔짱을 단단히 끼고 있었다. 아, 어쩐담... 마코토는 안절부절 못하며 사야와 하루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언가 문제가 생기면 그 당사자보다도 더더욱 어ᄍᅠᆯ 줄 몰라하며 어떻게든 해결하려 드는, 어쩌면 그의 나쁜 버릇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코토는 수영장 가로 다가가서, 여전히 둥실거리며 수영하고 있는 하루카를 내려다보았다. 외려 하루카는 그런 그를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하게 올려다보았지만 말이다.


“저, 하루 쨩, 사야 쨩이랑 싸웠어?”

“... ...으음.”


하루카는 쉬이 대답하지 않고 잠시 무언가 고민이라도 하듯이 시선을 도르르 굴렸다. 마코토는 그럼 그럴 줄 알았다, 라는 듯이 그를 작게 재촉하여-사야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다-물 밖으로 나오게 했다. 아직 물이 뚝뚝 떨어지는 하루카의 등을 툭툭 떠밀어 사야 쪽으로 가게 하는 것에 하루카는 무엇을 말하려는 듯 하다가 입을 꾹 다물고 사야에게로 걸어갔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그녀가 확연하게 평소와 다른 모습이어서일까, 마이페이스 성향이 강하다는 소리를 줄곧 듣는 하루카도 조금은 걱정되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기, 사야. 무슨 일 있어?

“…일이야 있지. 오늘 약속 취소된 거.”


꽤나 뾰족한 답이 되돌아왔다. 연보랏빛 눈동자에는 서운함이 가득 물들어 있었다.


“… …아직도 화났어?”

“그럼 화가 안 나겠어? 거기서 30분을 기다리고, 혹시나 해서 왔더니 넌 또 여기 있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수영이나 하고 있으니까!”


목소리가 점점 커져, 결국에는 수영부 전부가 그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잠시 멍하게 바라보다, 레이가 실례입니다! 라고 외치며 고우와 나기사의 고개를 숙이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햘금거리는 시선은 와 닿았다. 하루카는 그 시선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회까지 얼마 안 남았어. 너도 알고 있잖아.”


그렇다. 곧 있으면 또 다시 대회가 열리고, 그곳에 린을 비롯한 사메즈카 수영부가 나올 것은 자명했다. 뭐, 그것을 제치고서라도 하루카는 이번 대회에서 가장 자유롭게 수영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습해야 한다. 그녀 역시 평소에는 얼마든지 이해해주었을 텐데. 사야는 결국 울컥, 한 듯 하루카를 쏘아보았다. 서운함이 가득했던 눈에는 약간의 원망이 깃들어있었다.


“…진짜 할 말이 없다.”


짧게 내뱉은 그녀는 바닥에 놓여 있던 가방을 말 그래도 낚아채듯이 집어들었다.


“나 먼저 갈게. 대회 준비나 해. 지금 너에겐 나하고 보내는 시간이 아까울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도는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려있었나 아니었나. 그것을 확인하기에는 돌아선 그 등이 너무나도 확고하게 거절을 말하고 있었다. 하루카는 짐짓 놀라,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하루카의 손을 떨쳐내듯이 뿌리쳤다. 꿋꿋하게 뒤를 돌지 않고 거절을 표하는 모습에 그 외에 누구 하나 그녀를 가로막고 설 수 없었다.

사야는 홀로 거리를 걸었다. 오늘 아침과 같이 햇살은 마냥 찬란했지만 아침까지만 해도 길을 축복이라도 해주는 마냥 반갑게 느껴졌던 햇살이, 지금은 저를 놀리는 것처럼 느껴져왔다. 어린애도 아니면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눈꼬리가 시큰거리며 동시에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사야는 손을 들어 붉게 문든 눈꼬리를 가렸다. 

손 아래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리더니, 이내 줄을 이어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서러웠다. 사람들이 쳐다본다고 하더라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속상했다. 왜 자신은 그에게 있어서 첫번째가 될 수 없는지. 아무리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끝없이 다가가기만 하는 것은 지친다. 지쳐 있으면, 그 동안에 외면했던 서운함과 미움과 외로움이 때를 노리기라도 한 듯이 몰려든다. 그 서운함과 미움과 외로움의 결정이 아마도 지금 흘리는 눈물일 것이다. 눈의 여왕에서는 눈물을 흘림으로써 얼음같이 굳었던 마음이 다시 녹아내렸다고 하던데, 자신의 이야기에서는 반대인가보다. 사야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었다. 그가 미웠다.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한 번 정도는 그의 쪽에서 먼저 다가와줄수는 없는 것일까.

어느새 집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서자 정적이 맞이해주었다. 눈물자욱을 채 제대로 지우지도 못한채 다시 침대에 엎드렸다. 설움을 풀어내고 있자면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안는 침대의 온기에 저도 모르게 의식이 멀어지듯 잠에 들었다. 방의 전등불이 그녀를 오롯하게 비추고 있었다.


어둑한 밤, 집 앞에서 얼쩡거리는 무표정의 키 큰 남자아이. 누군가 본다면 크게 오해할 수 있는 모습이라 하겠다. 정작 그 자신은 덤덤한 것이 아니라, 안절부절 못해하고 있었지만 속내를 읽을 수 없으니 보는 이가 있었다면, 무표정이라 했을 것이다. 자꾸 눈 앞에 뒤를 홱 돌아선 사야의 모습이 어른거려, 그녀의 집 앞까지 찾아온 하루카는 어쩔 줄 몰라하며 제 핸드폰의 화면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발신중이라는 문자가 깜박거리는 화면은 도통 통화 중으로 바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은 서투른 것이 많다. 그런 것은 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좋아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꽤나, 어려웠다. 의식해서 수영을 하려고 할 때와 같았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혀는 달라붙었다. 닿으려는 손은 멈췄고, 위로를 위한 포옹조차도 팔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그녀의 화를 풀어줘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하루 종일 그녀의 마지막 표정과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막상 만나면 무어라 말을 못할 것을 알면서도 집 앞에 와버린 것이다.

방에 불은 켜져 있는데, 전화를 안 받는 것을 보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애당초 밤에 여자친구의 집 앞에서 여자친구가 뭐 하나 보러 온 것부터 아슬아슬한 경계다. 역시 돌아가는 편이 낫겠지. 내일 학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하루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전화를 끊고 다시 그녀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아, 역시 보고 싶다. 이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그녀가 화를 내는 일도 없을까. 조금은 제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 걷는 길은 어두웠다. 서둘러 집에 가야지… 순간 손에 들린 핸드폰이 울렸다. 놀라며 본 화면에는 사야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왜 전화했었어?


자고 있었을까, 살짝 낮게 깔린 목소리 끝에 물기가 배어나왔다. 울었을까. 잠깐 보러 왔었어. …사과하고 싶어서. 답하는 제 목소리는 떨리는 것 같았다. 많이 화가 났겠지 싶었다.

집 앞으로 급히 돌아가보니 그녀가 나와있었다. 발소리에 고개를 돌려 마주한 표정은 뾰로통한 그것이라, 조금 안심했다. 아직까지도 울고 있었다면… 하루카는 순간 눈에 띈 그녀의 붉은 눈가를 바라보았다. 역시 울었구나.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를 살짝 어루만졌다. 많이 아팠겠구나, 눈가는 물론이고, 마음이. 그런 생각을 하자 제 마음이 더 내려앉는 것 같았다.


“왜 왔는데?”


사야는 날 선 어조로 되물었다. 이렇게 대꾸하지 않으면, 이미 잔뜩 풀어진 제 마음이 고스란하게 내보일 것 같았다. 이렇게 물어도, 어차피 그는 또 그냥… 정도로 답하겠지. 그래, 하루카니까…


“…걱정돼서.”


하지만 정작 들려온 대답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사야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하루카를 올려다보았다.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꼿꼿하게 서 있던 더듬이가 하트 모양을 그릴 듯 가볍게 휘었다. 하루카는 사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가볍게 헛기침하고선 다시금 입을 열었다.


“신경쓰여서. 많이 울었어?”

“…아, …아니…”


저도 모르게 흐려지는 말 끝은 제가 많이 울었기 때문이겠지. 사야는 가만히 눈동자를 도르르 굴려 하루카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담담한 표정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녀만은 하루카의 표정 안에서 여러가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안도감, 안절부절함, 두려움, 웃음, 걱정… 꽤나 여러가지 것들이 드러나있구나 싶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 자체가 자신에게 마음을 쓰는 반증처럼 느껴져서일까.


“아닌 것 같은데.”


하루카는 사야의 눈가를 빤히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 정말로 분위기 안 읽는건 여전하네. 사야는 작게 픽 웃어버렸고, 이내 그 웃음을 억지로 감춰낸 채 입술을 비죽였다.


“그냥 그렇다면 그렇구나 해!”


가볍게 어깨를 탁 치는 것에 하루카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 다행이다, 그녀가 아직 풀어졌다, 고 한 적은 없지만 그녀가 어느 정도 화를 풀어주었다는 것을 눈치챈 탓이겠다. 잠시 투닥거리며 서로의 머리를 누르듯 쓰다듬고, 가볍게 가슴팍을 투닥거리다가 하루카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정말 미안해.”


직전까지 장난치던 것과는 다르게 진지한 어조였다. 사야는 조금 뾰족히 답하고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가, 손을 뻗어 하루카의 옷깃을 쥐었다. 그러고선 다시 입을 열었다.


“…알면 됐어. ….저기, 하루 쨩. 나 좋아해?”

“응.”


대답은 빨랐다. 하루카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답하곤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보다?”


이번에는 달랐다. 굳게 다물린 입술은 도무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르고 있었다고 하면 거짓말일테지. 하지만 그래도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제가 좋아하는 이에게 제가 처음이 아니라는데, 도대체 어느 누가 서운하지 않을 것인가.


“거짓말이라도 긍정해줄 수는 없어?”


그 정도로 네게 나는, 첫 번째가 될 수 없는걸까. 거짓말이라도 괜찮은데. 사야의 눈 한구석에서 무언가 희게 빛났다. 하루카는 무표정으로 그 눈 안쪽을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었다.


“너한테 기대한 내 잘못이야… 잊어버려.”


이내 그가 한참 들여다보고 있던 눈은 닫혔다. 사야는 눈을 내리감으며 하루카의 옷깃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안 돼. 지금 그녀를 놓치면 무언가 끝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루카는 부지불식간에 뒤돌아 가려는 사야를 잡았다. 아니, 잡았다와는 조금 다를까. 하루카는 그녀를 꾹 끌어안은 채 섰다. 귓가에 쿵쿵, 시끄러울 정도로 울리는 심장박동은 제 것일까, 그녀의 것일까.

사야는 볼이 잔뜩 새빨개진 채 손을 파다닥 내저었다. 무슨 일이야, 물으려던 순간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눈송이처럼 내려앉았다.


“…좋아해.”


눈이라는 것은 한 송이만 팔랑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눈송이들이 내려오는 것이지. 지금 하루카의 말도 그랬다. 그는 끊임없이 사야의 귓가에 좋아해, 사랑해, 라며 제 마음을 그녀에게 고스란히 내보이는 말을 속삭였다.


“그….만그만그만!!”


결국 터질 듯하게 볼이 달아오르고 나서야 사야는 하루카를 떼어낼 수 있었다. 그녀로부터 떨어진 그는, 어째서일까 조금 탐탁잖은 듯한,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너 진짜 몰라서 물어?!”

“…그렇지만, 평소엔 해달라고 그랬잖아.”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기야 하지! 사야는 잠시 그에게 쏘아붙일 말을 고심하며 고르다가, 팩 뒤돌아섰다. 나 갈 거야, 불퉁스레 말을 쏘아내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하루카는 다시 그녀를 붙잡았다. 이번에는 포옹이 아니었다. 그녀를 돌려세운 하루카는 잠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다, 얼굴을 가까이 해 그녀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는 가벼운 키스를 했다.


“… 잘 가.”


보내고 싶지 않다고 얼굴로 말하고 있으면서! 사야는 더더욱 터질 것 같이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는 듯이,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하루카의 품에 안겨들었다. 반칙, 이거 진짜 반칙이야…. 작게 중얼거리고 있으면, 역시 하루카라도 많이 부끄러운 듯 괜한 달을 노려보며 뺨에 가득한 열감을 어서 밤바람이 쓸어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몇 번이고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어르듯 쓸어내렸다.


“…평소에는 죽어도 안 해주면서. …미워.”

“… 아무리 나라도 사람들 있는 곳에서는, 이런 거 무리니까.”


서로에게 전해지는 불퉁스런 어조에는 달콤함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검푸른 밤바다는 평소처럼 어둠으로 감싸여 적막했다. 하지만 바다를 둘러싼 어둠이 묵직하고 차갑게 사람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어둠 한가운데서 은은하게 빛나는 빛 때문이리라.

그 빛은 저 밤하늘에서 조용하고 따스히 빛나며 상냥히 빛을 내어주는 달빛 같기도 하였고 동시에 발랄하게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며 반짝이는 별빛 같기도 하였다. 보는 이의 눈을 아프게 하지는 않지만 제 주변을 밝힐 듯하게 은은하게 빛나는 빛은 그곳에 있던 사내가 입은 아름다운 남빛 기모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빛의 기모노에는 흰 빛의 장미가 섬세한 손길로 수놓아져 있었는데 마치 달빛을 실 삼아 수놓은 장미 같이 빛나고 있었다.

사내는 마치 바다와 같았다. 부드러이 바위를 쓰다듬던 파도 한 조각을 베어낸 듯한 푸른빛의 굽슬거리는 짧은 머리와 햇살을 받아 제 자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는 듯한 아름다운 바다의 빛인 청록색의 눈동자가 맞물리니 더더욱 그래 보였다. 사내의 눈을 한 번이라도 응시한 사람이라면 그 눈에 빨려 들어 갈 것만 같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 사내의 매력적인 눈동자는 지금 단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그 한 사람만을 비추고, 그 사람만을 담고 있었다.

사내의 눈 안에 담긴 그 사람은 아름다운 푸른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아가씨였다. 아가씨의 푸른빛 머리카락 중간중간에서 간간히 반짝이는 연둣빛 머리카락은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가씨 역시 사내를 제 눈 안에 담고 있었다. 아가씨의 눈동자가 은은하고 묘하게 아름다운, 기려한 연분홍색 이었기에 그녀의 눈 안에 담긴 그 사내도 은은한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내는 서서히 팔을 들어, 그녀에게 제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내밀어진 그의 손을 잡지 않고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함께 걷지 않겠나, 알레샤.”

 

사내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차분했다. 마치 잔잔히 흘러와서 모래를 적시고 돌아가는 파도마냥 잔잔하고 나긋했다. 사내의 눈동자는 알레샤라고 불린 아가씨를 똑바로 응시하며 흔들리지 않았다. 알레샤는 여전히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기분 때문일까, 혹은 달빛의 마술인 걸까 그녀의 투명하리만큼 맑고 깨끗한 흰 볼에 아름다운 살구빛 꽃이 피어난 것만 같았다. 사내는 알레샤가 그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움츠러들지 않고 꿋꿋하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침묵이 그 둘을 휩싸고 돌았다. 놀랍게도 침묵을 먼저 쫓아버린 것은 알레샤였다. 꼭 다물려서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그녀의 입술이 살며시 열렸다.

 

“..손은 잡지 않겠어요. 피스케스.”

그것은 상관 없다. 너와 걷는 것이 목적이지 손을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피스케스는 내밀고 있던 손을 다시 거두어들였다. 알레샤는 다시 입술을 꼭 앙다물고선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인지 그녀는 피스케스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으려, 그의 청록색 눈동자와 제 연분홍빛 눈동자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피스케스는 그런 그녀를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지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 와 옆에 서서는 앞 만을 바라보았다. 서로를 바라보지는 않지만 서로가 있다는 것을 느끼며 서로 함께, 같은 방향을 향해 발걸음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둘은 본디 말이 많은 성품은 아니었기에 그들 주변에는 또다시 침묵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주변에 있는 이를 무겁게 짓누르고 숨통을 막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 침묵은 그들 사이의 무언가 미묘한 공기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지 알레샤와 피스케스를 가볍게 안고 돌듯 그 둘의 사이를 자유롭게 배회하는 듯 했다.

알레샤는 걷는 동안 계속 제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하고 희며 고왔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그녀의 손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다른 모든 감각을 짓누를 정도로 거대하게 느껴지는 차가움이었다. 필시 리베르타가 지금 잭 프로스트의 빙하곁을 지나고 있기에 그곳의 여왕인 그녀가 얼어있는 것이리라. 허나 그녀는 평소 자신이 얼어붙어 있어도 차가움을 느끼지 못했다. 이 차가움은, 그녀의 손을 감쌀 손의 부재를 느낀 정신이 느끼는 정신적인 차가움일 것이다. 알레샤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피스케스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의 정신이 누구의 부재를 느낀 것인지, 영민한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 할 리가 없었으니까.

피스케스 역시 한동안 알레샤를 바라보지 않은 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자타공인 상위 마족공. 알레샤가 계속 제 손을 매만지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그러쥐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는 그저 계속, 계속 말없이 알레샤의 곁에 서서 그녀와 함께 걸을 뿐이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의 별빛을 담은 듯한 옷자락이 사락거리며 움직여서 그와 그녀가 함께 걸어가는 길에 불을 밝혀주는 듯 했다. 그와 그녀가 걸어가는 길을 밝혀주는 것은 그의 옷자락 뿐만이 아니었다. 밤 하늘에 은은히 빛나며 제 광휘를 사람들에게 조각조각 풀어내어주는 달이 제 빛을, 바닷가에 있는 이 둘에게 온전히 나누어 주는 것 같았다.

 

“…달이 참 아름답지 않나?”

 

먼저 침묵을 깬 건 피스케스였다. 달이 아름답다,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었더라. 피스케스는 눈을 살짝 내리깔며 생각했다. 달이 아름답다는 것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했었지. 하지만 피스케스에게는 안타깝게도 알레샤가 아는 부분은 그것이 아니었다. 알레샤는 살포시 웃어, 백합꽃처럼 고운 미소를 얼굴에 피워내었다.

 

, 바다도 아름답네요. …별도 아름답구요.”

 

알레샤의 아름다운 미소가 조금은 이그러졌다. 백합꽃의 꽃잎이 한 장, 비틀렸다. 하지만 그 모습까지도 피스케스의 눈에는 그 이상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는 것은, 그녀가 알아차렸을까. 아마도 알레샤는 자신만의 생각에 심취하여 있느라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은 평소보다 살짝 더 어지럽혀져 있었다. 바다가 아름답다는, 당신에게 빠져있어요. 그리고 별이 아름답다는 당신은 이 마음을 모르겠죠. 그녀는 이것을 토대로 달이 아름답다는 말에 숨은 뜻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있었다.

밤바람은 찼지만 알레샤는 그런 것은 생각치 않은 채 그저 제 자신만의 생각에 골똘히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알레샤를 한참 바라보던 피스케스는 그녀에게 살며시 다가가서 제 어깨에 걸쳐져 있던 망토를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알레샤는 그런 피스케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피스케스의 볼에 낯꽃이, 분홍빛의 아름다운 낯꽃이 피어났다. 피스케스는 잠시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추워보인다. 이제 슬 돌아가도록 하지.”

 

발자국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달은 지금까지 자신이 비추었던 길을 다시금 비추어 두 사람의 주변에 제 빛을 흩뿌려주었다. 바다 역시 그들을 배웅하듯이 나직하게 철썩거리며 파도를 보내었다.


'자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르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리루미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도랏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꼬모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ROSE 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어깨까지 내려올 듯한 길이의 붉은 머리, 그 머리카락이 살짝 가릴 듯 말듯하게 있는 날카로운 눈매. 그 눈매는 핏빛 같은 새빨간 눈동자를 머금고 있었다. 마치 그가 흘리게 한 이들의 피를 품고 있는 듯한 새빨간 눈동자. 그 눈동자는 지금 제 앞에 부복하여 있는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의 입가에서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 왕의 신하들은 언제 자신에게 불똥이 튈 지 모르기에 전전긍긍하며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왕은 입을 열었다.


“…죽여라.”


단순하고도, 또 그렇기에 한없이 잔혹한 말. 자신의 말에 대한 이의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 강하게 담겨있는 붉은 눈동자. 신하들은 감히 그 눈동자를 마주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이의를 제기했다가는 그의 앞에 꿇어앉혀져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전하, 전하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전하.”


그의 앞에 부복하고 있던 사내는 애절한 어조로 탄원하듯이 말했지만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그저 귀찮다는 듯, 짜증이 난다는 듯 손짓해서 경비병들에게 그를 끌어내도록 했다. 그는 아까부터 귓가를 쟁쟁 울리는 예의 그 ‘목소리’ 때문이었다. 이제 곧 죽을 그의 신하가 그에게 간언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그의 귓가에서 당장 죽이라고 쉴새없이 속삭이는 기분나쁜 목소리. 레인은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두통이 몰려오는 기분에 미간을 잔뜩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귓가에 교태롭게 속삭이는 여자의 미성을 닮았지만 그 미성으로 속삭이는 내용은 죄다 피투성이인 이야기뿐이라, 그것을 계속 듣는 왕의 성정이 날로 거칠어 지는 것도 알만한 일이었다.

사내가 끌려나간 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다지 길지는 않은 시간이었으나 그 안에 서 있는 신하들과 시종들은 누군가 ‘블러드레인’ 왕의 심기를 거스를 때면 늘 그랬듯이 이 시간이 미치도록 길게 느껴지는 것을 체험해야만 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사내를 끌고나갔던 경비병 중 하나가 평소보다 더 질린 표정을 하고서는 핏방울이 맺혀 떨어지고 있는 주머니를 들고 들어왔다. 필시 경비병끼리 한 내기에서 져, 잘린 사내의 목을 들고 들어오는 일을 맡게 된 것이리라.

제 본명보다 블러드레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칭해져, 이제는 아무도 그의 본명을 기억하지 못하는 붉은 왕은 주머니로 흘끗 시선을 던지더니 입술을 열어 내다버리라 명했다.


“그 놈은 감히 이 내게 대적한 역적이다. 시신을 찾으러 와도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네놈들이 매장을 해주어도 안 된다. 그저 새들에게 뜯어먹히고 바람과 비에 문드러지도록 놔두어라.”

“..예?”

“…방금 말한 것을, 분명 들었을 텐데.”


감히 인간으로써 하기 힘든 잔학무도한 명령에 경비병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둥글게 뜨며 난색을 표하자 레인의 붉은 눈동자가 언짢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경비병을 노려보았다. 경비병은 역시 자신의 목이 아까웠던 것인지 움찔하고선 예에 맞추어 인사를 하고선 허둥지둥 나가버렸다. 레인은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의 앞에 서 있던 신하들을 손짓으로 돌려보냈다. 그 중에 그를 걱정하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은 단 한 사람.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을 단정하게 정리한, 조금은 부드러운 눈매 사이에 붉은 눈동자를 간직한 사내였다. 그의 이름은 라이칸. 라이칸은 안타깝다는 듯한 눈으로 레인을 잠시 바라보다 자신 역시 그곳에서 나가는 문으로 향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시간은 오늘 낮에 죽은 사내를 위해 애도하는 시간 따위는 가지지 않았다. 그저 착실히, 평소와 같이 흐르고 또 흐를 뿐이었다. 

낮에 가장 높은 곳에 떠서 온 세상을 찬란히 비치던 태양이 비추지 못하는 작은 방에서는 조금은 은밀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처형밖에 모르는 놈!”


젊은 사내가 분노에 차서 책상을 거칠게 내리치며 외쳤다. 그는 오늘 낮에 왕에게 간언을 하다가 왕의 분노를 샀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된 사내의 조카였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 분개하고 있는 것은 젊은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조금은 나이가 들어 원숙한 미를 뽐내고 있는 부인은 손에 쥐고 있는 손수건을 찢어질 듯 거칠게 쥐고 있었다. 


“그렇게 화를 내어도 바뀌는 것은 없어. 미하일.”

“그럼 그냥 가만히 있자는 거냐!”

“내가 언제 가만히 있자고 했지? 남의 말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여전하군. 언제쯤이면 클 셈이지?”


청년은 그와 정반대로 굉장히 냉정하고 차분해보이는 아가씨와 신경질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의 뒤편에 앉아있던 부인이 일어나 그들 사이에 서서 그들의 대화를 물리적으로 끊어버렸다.


“그만두거라. 지금 이곳에서 무엇하는 짓이냐. 미하일, 마리안느. 너희들은 정말 어릴 적부터 둘만 만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를 못하는구나. 그래서, 둘 다 생각한 바가 있으니 이렇게 모이라고 한 것이겠지.”


부인은 그렇게 말하고선 다시금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에 다시 앉았다. 마리안느라고 불린 아가씨는 미하일이라고 불린 청년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서는 손수건을 꺼내어 제 입가를 가볍게 두드렸다.


“제가 아무 생각 없이 여러분들을 모이라 하지는 않았겠지요. 실은 생각해 둔 바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아가씨는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대화에서는 혈향이 짙게 풍기는 듯 했다. 


“…폐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답하는 이는 없었다. 나직한 목소리를 뱉어낸 장본인인 검은 머리의 사내는 사려깊은 눈동자에 한 줄기 근심을 담은 채 시선을 살며시 떨구었다. 이 나라의 현 왕이자 제 동생인 블러드레인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찬 듯한 눈동자였다. 본명이 불리는 일이 없이, 계속하여 블러드레인이라고 불린 나머지 아무도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는 왕. 그저 폭군이라고만 불리어 이 나라의 모든 공포와 저주를 다 받아들이고 있는 왕. 그 왕을 생각하는 검은 머리의 사내, 라이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그의 귓가에 이곳에서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려왔다. 이질적인 소리는 그의 한숨소리보다도 작았지만 라이칸은 왕을 호위하는 호위기사. 이 나라 최고의 실력을 가진 기사인 만큼 그 소리를 단번에 잡아낼 수 있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 소리가 어디서 났으며, 어떤 소리였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끼익, 끼익. 묘하게 불길해보이고 거슬리는 소리. 다른 이들이었으면 밤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깃발과 그 깃발을 고정하고 있는 밧줄에서 나는 소리라고 생각했겠지만, 라이칸은 이 소리가 깃발에서 나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곳에서 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랬기에 그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뒷걸음질로 걸어 레인이 있는 침실의 문이 확실히 닫혀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끼익거리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왔다. 라이칸은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고요히 검을 뽑아들었다. 아무도 그가 그곳에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문득 계속해서 들려오던 끼익거리는 소리가 멎었다. 라이칸은 드디어 숨까지 멈춘 채 그 다음에 들려올 소리, 눈에 보일 움직임에 집중했다. 밤의 베일 속이라 무언가가 뚜렷하게 보이기 어려웠고 어떤 소리인지도 모르는 특정한 소리를 듣는 것이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칸은 경계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아니, 경계를 흐트러트릴 수 없었다. 그가 지키는 것은 아무리 폭군이라는 말이 많아도 이 나라의 왕, 그에 더해서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소중한 남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형들, 많은 동생들을 많은 이유로 잃었다. 라이칸은 더 이상 제 동생을 잃고 싶지 않았으며, 제 실수로는 더더욱 잃고 싶지 않았다.

자그마한 소리가 들려왔다. 생쥐 같은 것이 돌바닥을 걷는 것 같은 자그마한 소리. 라이칸은 그 쪽에 시선을 던지지 않고, 계속해서 정면을 바라본 채 그저 귀만 쫑긋 세웠다. 그러자 그가 바라보고 있던 창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위무사가 제법이라더니, 이야기가 거짓은 아니었구나.”

“웬 놈이냐.”

“저런, 쓸데 없는 질문을. 네놈도 내가 무엇하는 이인지는 알고 있을 것이 아니냐.”


가느다란 미성이 이어졌고, 이내 창문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달빛을 받아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선연하게 빛났다.


“비켜라, 블러드레인의 목을 거두러 왔다.”

“왕의 호위무사로써 그 말을 듣고 비킬 거라고 생각하느냐.”

“네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면 비키겠지. 이 생에 미련이 없느냐?”


여자는 비웃는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라이칸의 눈썹이 살짝 치켜세워졌다.


“누가 보내서 온 것이냐.”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지 않느냐?”

“…역시 그들인가.”


라이칸은 탄식하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 날, 해가 떠 있던 시간에 처형당한 그 신하의 가족이 보낸 암살자이겠지. 그 쯤은 눈을 감고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순간, 암살자는 등 뒤에 매달고 있던 사브르 두 자루를 빼내들었다.


“유감이구나, 꽤나 잘생긴 얼굴이라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데.”


여자는 말을 마치고 잠시 킬킬대다가 라이칸에게로 쇄도해 들어왔다. 경악할 만한 속도였다. 라이칸은 순간적으로 숨을 훅 들이키며 뽑아들고 있던 롱소드를 제 앞에 세워 여자의 돌진을 저지했다. 팔에 전해져오는 통증이 묵직했다. 여자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어려운 길을 택하는구나.”

“내가 할 소리다. 암살자.”


여자는 뒤로 두 발, 풀쩍 뛰어 물러섰다. 그리고 또 다시 둘은 검을 맞부딪혔다. 날붙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려퍼졌다. 평소 같았다면 계단 아래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이 올라와 라이칸을 도왔을 것이나 아무도 이 곳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무슨 수작을 부린거냐.”

“내 파트너는 신중한 걸 좋아해서 말이지-.”


여자는 키들키들 웃어보였다. 보아하니 약으로 그들을 잠재웠거나 이미 명을 끊어버린 것 같았다. 라이칸은 다시 한 번 이를 악물었다. 이 얼마나 잔악한 행위인가. 다시 침묵이 흐르고 공간 안은 날붙이들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로 가득했다. 공간 안에 혈향이 맴도는 것 같기도 했다. 서로를 향한 살기를 날카롭게 펼쳐내며 검으로 찌르고, 베어내고 내리쳤다. 공격을 막고 산대의 힘을 이용해 더 날카로운 공격을 펼치길 몇십번.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새 둘 다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상대가 강하다는 것에서 오는 정신적인 압박감과 몇 번이고 강력한 공격을 펼치고 또 그것을 막아내면서 피로가 쌓일 대로 쌓여버린 몸. 바로 그 때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요란한 발소리와 술렁거림. 새벽의 순찰을 돌던 경비병들이 뻗어있는 병사들을 발견 한 모양이었다. 여자는 아깝다는 듯 혀를 쯧, 하고 차고서는 제 손에 들고 있던 사브르를, 라이칸을 향해 내던졌다. 예상치 못했던 공격이었기에 피할 수는 없었다. 사브르는 라이칸의 왼 팔을 깊게 베고 땅에 떨어졌다. 팔에서 전해지는 강한 통증에 라이칸이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을 내뱉는 순간 여자가 몸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자신이 들어왔던 창문으로 다가가서, 장치해두었을 것이 뻔한 밧줄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라이칸은 피를 흘리는 왼팔을 붙잡고 창가로 달려갔지만 이미 사라져버린 그녀를 찾을 수는 없었다.

이내 그곳으로 무장한 기사 둘이 달려올라왔다.


“라이칸 님! 무슨 일이십니까! 피를 흘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암살이다. 일단은 막았으니, 오늘 밤은 더 오지 않겠지만..경비를 강화하도록.”


라이칸은 기사들을 내려보내고는 한숨을 쉬며 땅에 떨어진 사브르를 주워들었다. 그때 방 안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몇백번이나 들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의 왕이시여. 부디 평안히 주무시기를.”


'자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아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리루미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도랏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꼬모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ROSE 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여름의 밤은 파티 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그 말을 한 이가 누구든 간에 그는 지금 엄청나게 저주를 받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살아 있다면 왠지 자신의 귀가 가려움을 느끼고 낑낑대고 있을 것이고 혹여 죽었다고 해도 귀가 있을 자리인 두개골의 옆이 가려울 정도의 엄청난 저주였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저주는 바로 가르시아 가문의 사용인인 셰릴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물론 여름의 밤은 날파리 등을 제외했을 때 실제로 파티를 열기 좋은 계절이었다. 달빛이 살짝 내려앉아 더 신비롭고 생명력 넘쳐 보이는 신록의 푸르름. 그리고 낮에 피부를 할퀴듯이 달려들어 사람들의 진을 빼던 열기를 쫓아주며 상쾌함을 안겨주는 시원한 밤바람. 그런 것들을 다 종합해 보았을 때 밤에 여는 파티는 여름이 제격이었다. 셰릴이 이토록 화를 내는 이유는 첫째, 파티란 준비하는 데에 많은 손길과 시간이 필요하므로 사용인들은 낮에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있겠고 둘째로는 셰릴이 주방, 그것도 오븐 앞에서 일하는 빵 굽는 아가씨라는 것이겠다. 안 그래도 더운 여름에 시원한 바람 하나 가까이 오지 못하는 오븐 앞에서 빵만 구워대고 있으려니 짜증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아아, 대체 반죽은 언제 다 떨어지는 건데? 짜증나, 바우어는 어디 갔어? 적당히 쉬고 교대해주지 않고?!”


짜증이 잔뜩 어린 그녀의 목소리가 주방 안에 짜르랑하니 울렸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셰릴은 꽤나 예쁘장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뒤를 돌았다. 그녀의 뒤에는 단정하게 생긴, 모노클이 꽤나 잘 어울리는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싱긋이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셰릴은 기겁을 하고 놀라며 급하게 허리를 깊숙하게 숙였다.


“지, 집사장님!”

“셰릴, 수고가 많네요. 조금만 더 수고해주시겠어요?”


집사장이라 불린 그 사내의 이름은 모르테. 가르시아 가문의 집사로써 이 파티를 총괄하고 있었다. 그러니 짜증을 내다가 그에게 걸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셰릴이 당혹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모르테는 주방을 한 번 둘러보고 입 꼬리에 미소를 건 채 다시 주방 밖으로 걸어나갔다. 평소라면 셰릴에게 꾸중을 한바탕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는 발걸음을 조금 재게 놀려 계단을 걸어 올라가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된 흰 문 앞에 섰다. 눈송이를 형상화하기라도 한 것인지 문에 새겨진 무늬는 참으로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모르테는 장갑을 낀 손으로 문을 두어 번 가볍게 노크하고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이내 문 안쪽에서 가느다랗고 청명한 미성이 그에게 들어오라 허락했고, 모르테는 그제야 문을 열고 그 안에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좋은 오후입니다, 아가씨. 저녁이면 파티가 시작되는데 준비는 다 하셨는지요?”


모르테는 정중한 태도로, 제 가슴에 손을 가벼이 얹은 채 허리를 깊숙하게 숙여 인사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방 안쪽에 서 있던, 연하늘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소녀가 제 연하늘빛 눈동자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모르테를 바라보던 그 아가씨의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준비는 다 했어, 모르테야 말로 파티 준비는 착실히 다 되어가고 있는 거야?”

“물론입니다, 디오네 아가씨.”


모르테가 말한 대로, 그녀의 이름은 디오네였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디오네 폰 가르시아. 가르시아 가문의 가주인 에레부스 폰 가르시아의 막내딸이자, 귀여운 고명딸이었다. 

아름다운 꽃에는 벌레가 꼬인다고 했던가,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다고 했던가. 모르테는 제 앞의 아가씨를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이 아가씨가 납치당했던 것이 얼마 전의 일이었던가. 아름다운 백합꽃, 한 떨기의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여린 백합꽃은 그 날 이후로 얼음으로 조각된 꽃이 되어 돌아왔다. 어쩌면 그 전보다 더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가시를 단단히 세우고 제 곁에 다가오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매섭게 위협하여 쫓아버리는 꽃이 되어버린 것이다. 뭐, 그 가시마저 다 품어버릴 수 있는 자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모르테는 그 자의 얼굴을 생각하곤 입 꼬리를 비틀어 올려 작게 비웃는 듯한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디오네는 그런 모르테의 미소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가벼이 모른 척을 하며 넘어갔다. 

디오네의 방문을 누군가 가볍게 두드렸다. 가볍지만 힘이 실려 묵직한 소리를 내는 노크, 그리고 칼집이 내는 나직한 잘그락 소리. 아아, 그 자다. 모르테의 입가에 매달려있던 작은 미소가 더 짙어졌다. 역시 양반은 못 되는군, 모르테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선 문 쪽을 바라보았다.


“들어오시죠. 클레비스 소공작.”

“왜 네 녀석이 여기 있는거야? 나는 디오네 양을 보러 온건데.”


툴툴거리며 짙은 남빛 머리의 기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훤칠한 키로 뭇 여성들을 설레게 하는 모르테보다도 더 크고 훤칠한 키와 탄탄한 몸매. 사교계에서 화제가 될만한 근사한 사내였다. 하지만 그가 이런 저런 파티에 자주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에게 이미 아름다운 피앙세, 즉 약혼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 약혼녀의 이름은 디오네 폰 가르시아. 그렇다, 그는 방금 제 약혼녀의 방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것이다. 그때까지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디오네의 입꼬리가 살며시 말려올라갔다. 많이 티는 나지 않더라도 그녀 역시 헬이 찾아온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헬은 그런 그녀를 보고 활짝 웃으면서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깊게 허리숙여 인사했다. 디오네 역시 제 치맛자락을 살며시 잡은 채 허리를 숙여 우아하게 인사했다. 헬은 이내 허리를 세우고 디오네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쥔 채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디오네의 뺨에 은은한 벚꽃이 피어났다. 한 쌍의 사랑스러운 연인이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연인이었기에, 누가 보더라도 자연스레 미소를 띄울 것만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는 이가 있었다. 그는 당연히 이 방 안에 서 있는 모르테였다. 그는 가벼이 헛기침을 하여 디오네와 헬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도록 하였다. 디오네와 헬이 자신을 바라보자 모르테는 눈을 휘어 싱긋 웃으며 헬이 디오네의 손을 놓도록 하였다. 헬이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모르테는 웃음으로 그 표정을 묵살해버렸다.


“아가씨는 아직 치장이 덜 끝나셨습니다. 클레비스 소공작. 아무리 피앙세라 하더라도 파티를 준비중인 숙녀의 방에 들어오는 것은 꽤나 실례지요. 그렇지 않나요?”

“제기랄. 처음부터 끝까지 맘에 드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녀석이야, 너란 녀석은. 너랑 소꿉친구만 아니었어도 당장 베어버렸을 텐데.”

“그쪽이야 말로 저와 친구라는 것을 감사히 여기시죠. 그렇지 않았으면 이 집 안에 단 한발도 들여놓지 못했을 테니.”


헬과 모르테는 서로를 향해 활짝 웃으며 험악한 말들을 쏟아내었다. 디오네는 그 모습이 재미라도 있는 것인지 그 둘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툼은 금세 끝났는데, 모르테가 헬을 방 밖으로 몰아낸 탓이었다. 헬은 혹여 디오네의 귀에 좋지 않은 말들이 흘러들어갈까봐 입 안으로만 온갖 욕설을 중얼거리며 일단은 디오네의 방 앞을 떠났다. 그래도 몇 시간 후면 열릴 파티에서의 디오네가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하곤 기분이라도 갑자기 좋아진걸까 방을 떠나 시간을 때울 곳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꽤나 가벼웠다.

헬이 떠난 이후-엄밀히 말하면 모르테가 일방적으로 헬을 내쫓은 이후-디오네의 모르테가 시녀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대로 옷을 갈아입고, 장신구로 치장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르테는 디오네의 집사. 그녀의 행복을 최우선에 두고 행동하는 이다. 방금 헬이 왔을 때의 복장을 보고 그가 파티 때는 어떤 복장을 차려입고 올지 추론한 그는 그에 맞게, 헬과 디오네가 완벽한 한 쌍으로 보일 수 있도록 디오네의 옷차림을 조율하고 있었다. 디오네가 헬과 함께 있는 것을 행복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헬 폰 클레비스 소공작이 입장하십니다!”


문지기가 연회장 안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연회장 안의 사람들 사이로 웅성이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헬 폰 클레비스. 남자들 중에서 사교계의 꽃을 뽑는 투표가 있다면 그는 분명히 선택지에 있을 것이고, 그가 꽃으로 뽑힐 확률도 높은 남자였다. 약혼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사방에서 러브콜을 받는 남자. 심지어 공주님들마저도 관심을 가지는 남자였다. 특유의 상냥함과 정중함으로 여성들의 인기를 휘어잡고 있지만, 남자들이 그를 적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정중한 태도로 일관했으며, 약한 것도 아니었다. 당당히 실력만으로 왕실 기사단의 행동대장 자리를 꿰찰 정도였으니 충분히 강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웅성거림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헬은 그런 웅성거림을 뚫고 정면으로 당당히 걸어나갔다. 가르시아 가문에서 연 파티이니만큼 연회장의 앞에는 가르시아 가문의 수장인 에레부스 폰 가르시아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딸인 디오네 폰 가르시아가 서 있었다. 에레부스의 아들이자 디오네의 오빠들 역시 화려하고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미는 헬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헬의 눈에는 오로지 디오네만이 들어오고 있었으며, 디오네 외의 존재는 눈에 들어온다고 해도 그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디오네의 앞으로 걸어간 헬은 그녀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많은 여성들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나왔다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것이다. 


“디오네, 나의 여왕님. 제게 오늘 하루, 당신을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연회장 안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기는 했지만, 헬의 그 말은 연회장 전체로 울려퍼져,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디오네는 그때까지 딱딱하게 굳어, 마치 얼어버린 것만 같던 표정을 풀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부드럽게 거머쥐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와 헬이 내민 손 위에 제 손을 살며시 얹었다.


“잘 부탁해요, 헬. 오늘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내 손은 당신의 것이니까요.”


헬은 싱긋 웃으며 몸을 일으켜, 디오네를 에스코트했다. 디오네의 아버지인 에레부스는 만면에 가득한 미소를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 납치 사건 이후로 디오네의 미소를 보는 것은 손가락에 꼽을 만한 일이었으니 어지간히 기뻤으리라. 헬은 디오네와 함께 걸으며 그녀의 귓가에 다정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연신 속삭이고 있었다.


“오늘 생일 축하해요, 디오네 양. 이런 특별한 자리에 초대되어, 당신을 에스코트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기쁠 수는 없을거예요.”

“헬, 당신 말고 내 손을 잡을 수 있는 남자는 없어요.”


디오네의 말은 짧고 간결했지만 헬은 그 아래에서 애정을 조금 발견할 수 있었기에 그의 미소는 더 깊어졌다. 서로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연인들의 속삭임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오직 서로만을 향한 속삭임, 서로만을 향한 마음. 해가 지고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도 그 둘만은 환하게 빛을 발하는 듯 했다.

 자신의 머리색과 비슷한 남빛의 제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헬과 진한 남빛의 공단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은 디오네는 그 누가 보아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서로를 향한 미소와 작은 새들의 노래마냥 재잘거리는 듯한 속삭임. 헬이 무릎을 꿇을 때 약간의 질투로 디오네를 시기하듯이 바라보면 귀족 영애들마저도 그 달콤함에 물들게 할 만한 달콤함이 그들에게서 전해져오고 있었다.


“무언가 마시고 싶은 거라도 있나요, 디오네?”

“저는 헬이 마시는 거라면 무엇이든 좋아요.”


디오네는 약간 부끄러운 듯 양 뺨에 낯꽃을 피워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헬은 그런 디오네의 모습마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싱긋이 웃으며 그녀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금방 다녀올테니, 나의 여왕님. 부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말아줘요.”


디오네는 고개를 새침하게 돌렸지만, 미미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미처 감추지 못한 올라간 입꼬리를 발견한 헬은 싱긋 웃으며 음료를 들고 있는 웨이터나, 음료가 놓인 테이블을 찾기 위해 걸어갔다. 디오네는 그런 헬을 기다리며 테라스 근처에 서서 가만히 창 밖으로 펼쳐지는 무수한 별의 회화를 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밤하늘에는 쏟아질 것마냥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검푸른 밤하늘이란 천에 진주로 하나하나 수를 놓던 천사가 수놓던 진주들을 전부 천 위에 실수로 쏟아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밤하늘은 영롱한 별들로 쉴새없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밤하늘을 바라보는 디오네의 눈 역시 영롱하게 빛났다. 연하늘빛 눈동자에 진남빛의 하늘이 비쳐, 마치 진남빛 공단 위에 놓인 오팔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눈동자에 홀리기라도 한걸까, 그 근처에서 제 친구들과 지절거리며 와인을 마시던 젊은 남자가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그 즉시 밤하늘을 향해있던 디오네의 눈동자는 지상으로 내려와서 그 남자를 향했다. 방금까지 아름답고 영롱하게 빛나던 눈망울에는 자신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에 대한 분노와 짜증, 그리고 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샘솟아 나오는 두려움으로 가득찼다. 남자는 그런 것들을 읽지 못한 것인지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디오네에게 한 발 더 다가가서는,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마드모아젤 디오네 폰 가르시아. 저는 라이네르 왕국에서 온 대사의 아들인 에른스트 드 라인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 그대를 만나다니, 아무래도 오늘은 저의 날인가 보군요. 행운의 여신인-“

“…물러나요.”


자신을 에른스트라고 소개한 금발머리 남자의 말을 끊은 것은 디오네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서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시선은 아래로 떨군 채, 디오네는 입술을 악물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쪽과 이야기하기 싫으니까.”

“아아, 이거 서운하군요. 제게는 단 한번의 기회도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마드모아젤 같은 미인을 남자 혼자만 독점하는 건 너무나도 큰 손해인걸-“

“이야기 하기 싫다고!”


결국 디오네는 참지 못하고 날카롭게 소리질러버렸다. 그녀의 비명 같은 소리가 짜랑, 하고 울려 넓은 연회장 전체에 울려퍼졌다. 헬 역시 그 소리를 들었다. 그는 디오네가 있는 곳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에른스트는 멍하게 디오네를 바라보았다. 디오네는 에른스트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눈망울에는 눈물이 잔뜩 고여, 금방이라도 떨어질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제 온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것은 헬보다 디오네의 세 오빠들이었다. 그들은 소중한 여동생의 눈물을 보자마자 에른스트를 끌어내기 위해 움직였으나, 디오네의 곁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헬이었다. 헬의 두 눈에는 불이 이는 듯 했다. 마치 제 새끼를 해한 사냥꾼을 발견한 어미 호랑이의 눈마냥 거센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다. 헬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에서 검을 뺴내들었다.


“감히, 감히 누구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한 것이냐. 네가 누구든, 무엇하는 놈이든 상관 없다. 디오네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한 이상, 죽음으로 보답하게 할 것이다!”


 그 누구도 비명을 지르지 않을 정도로 다들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헬은 이를 악문채 빠르게 에른스트에게 달려들었다. 에른스트는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헬. 아가씨의 생일은 제대로 챙긴거냐?”


그 상황과 전혀 맞지 않은, 생뚱맞은 말이었다. 헬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르테였다. 평소처럼 깔끔한 정장 차림에 모노클과 장갑까지 완벽한 모습의 그는 디오네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아가씨의 약혼자는 무모하군요. 허나 아가씨의 명예를 위해 저리 칼을 빼든 것이니 너무 노여워하지 말아주십시오.”


디오네에게 손수건을 건넨 그는 헬에게 다가왔다. 그의 입가에 삐딱한 미소가 걸렸다.


“오, 멍청한 내 친구. 이곳은 연무장이 아니야. 술이라도 마신건가?”


디오네는 그제야 검을 본 것인지 살짝 흠칫했다. 그것을 본 헬은 당장 검을 검집에 넣은 채 제 종자에게 검집을 통째로 맡기고선 당장 디오네 곁으로 다가가, 모르테가 건넨 손수건은 제 허리띠에 쑤셔넣고, 제 손수건으로 디오네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를 달랬다. 디오네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떨리는 손으로 헬을 꼭 붙잡았다. 모르테는 그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가, 미소를 제 얼굴에서 싹 지운채 에른스트를 향했다.


“이 무슨 무례인지.”

“그, 그렇게 생각하죠, 당신도. 저 자는 방금 날 위협-“

“클레비스 소공작을 칭한 말이 아닙니다. 에른스트 드 라인델. 아니, 에른스트 라인델. 남의 약혼자에게 함부로 수작을 거는 것도 모자라서 위협까지 하다니, 내가 이 자리에서 당신을 베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막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 아가씨가 싫어하실 것 같아 그런 것이지. 그러니 당장 이곳에서 나가시죠. 끌어내라고 명령하기 전에.”


모르테의 어조는 정중했지만 무례했다. 예법에 어긋난 것은 없었지만 상대를 깔아뭉개는 어조. 에른스트는 잠시 이를 갈다가 연회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모르테는 그제야 좌중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질투가 많은 연인이군요, 저희 가문 아가씨의 피앙세는. 이런, 음식들이 식고 술은 미지근해지는군요. 이 시간은 지나가면 다신 오지 않는답니다. 음악을 듣고 선율에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밤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다시 재잘거리며 생기발랄하게 떠들었다. 디오네는 헬의 손을 꼭 잡고 있었고, 헬은 그녀에게 연신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그녀의 곁을 비워서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그래도 행복한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르테는 행복해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다시 제 눈에 담고 연회장 한켠으로 가서 섰다. 달과 별이 디오네의 생일을 맞아, 헬과 디오네를 축복하는 듯 밝게 빛났다.


'자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아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세르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도랏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꼬모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ROSE 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야, 그거 알아?”

 “..뭐.”


 길을 걷는 한 쌍의 남녀는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길게 기른 연하늘색 머리의 아가씨와 가무잡잡한 피부의 검은 머리 청년이었다.


 “왜 시비조야? 기분 나쁘게.”

 “네가 기분 나쁘기 때문이지. 헛수작하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에스트레아 페른.”

 “아니, 이 빌어먹을 자아도취 왕자가.”


에스트레아라고 불린 여자는 제 옆을 걷던 남자-샤흐나즈 지브릴 유수프 하룬 할리드-의 옆구리를 제 팔꿈치로 내질렀다. 샤흐나즈는 도끼눈을 치홉뜨며 에스트레아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빌어먹을. 너랑 같이인걸 알았다면 절대 안 왔어..”

 “누구는 알고 온 줄 아냐? 와이크함이 오는 줄 알았다고! 와이크함네 애기들 보러 가는 건데!”

 “길드장이 그것도 모르냐!”

 “길드장이 신인줄 아냐! 애초에 네가 오늘 아침에 가겠다고 변덕부렸잖아!”

 “그때는 네가 아니라 엘레나가 가는 줄 알았으니까!”

 “엘레나 건드리면 머리카락 죄다 뽑아버린다!”


 둘은 한동안 서로를 향해 왁왁거리다가 씨근거리며 숨을 골랐다. 엘레나는 흐트러진 제 머리를 다시 곱게 정리하며 샤흐나즈를 흘겨보았다. 샤흐나즈도 그냥 지고 있지만은 않았는데, 그 역시 그 붉은 눈을 최대한 험악하게 부라리며 에스트레아를 바라보았다. 녹색과 붉은색의 시선이 첨예하게 부딪혔다. 에스트레아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안개가 낀 날에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라고. 이 흐느낌 소리가 뭐냐면 말이지, 안개 낀 날에 사라지는 사람들을 위해 우는 귀신의 울음소리라는 이야기가 있어.”

 “헛소리 하지 마. 이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악마도 있는데 귀신이라고 없겠냐?”


 차분해진 것은 고작 1분 남짓이었을까, 그들은 또 다시 티격태격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다퉈가며 길을 걷던 와중, 샤흐나즈는 에스트레아의 어깨를 잡아돌려-그녀는 계속 그의 쪽을 향한 채로 무언가의 불만을 털어놓고 있었다-앞쪽을 보게 했다. 짜증을 내는 듯 잔뜩 찡그려진 그녀의 미간이 앞의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환히 펴지었다. 무언가, 놀라운 것을 발견한 듯이.


 “저게 뭐야..?”

 “아마도 네가 말한 그 안개겠지.”

 “아무래도 그 유령이, 오늘도 슬퍼하는 모양이네. 도망갈건 아니지, 왕자님?”

 “누가 도망가. 너나 도망갈 생각 마라.”


 그들은 그런 대화를 주고받고선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띄워올렸다. 호승심으로 홧홧하게 불타오르는 듯한 미소였다.

 마을 안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안개가 낀 날에 귀신이 나온다, 라는 괴담이 퍼진 탓이었을까. 에스트레아와 샤흐나즈는 조용한 마을 안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고, 이내 서글프게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신경을 한껏 곤두세웠다. 같은 길드의 일원이 부탁한 일, 그저 제 아들들이 잘 지내는지만 보고 인사 좀 전해줘. 라는 이 간단한 부탁이 이런 오싹한 일을 동반하고 올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샤흐나즈와 에스트레아는 씁스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씁스레한 미소 뒤의 눈동자는 무언가에 대한 호승심으로 활활 불타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두운 머리 아래로 금안을 빛내는 사내는 안개 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안개가 낀 날 나타나서 우는 귀신이 두렵지도 않은지 안개 속을 잘도 헤치고 다녔다. 아니, 그는 안개 낀 날의 귀신을 두려워할리 없었다. 그가 바로 그 귀신의 정체였으니. 그런 형형한 소문의 주인공이 된 사내는 어딘가 기괴해보이거나, 험악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글서글한 인상 쪽에 더 가까운 인상이었다. 그것은 말려올라간 그의 입꼬리 때문일까, 혹은 발갛게 부어오른 그의 눈가 때문일까. 사내는 그 대답을 알고 있지 않았다. 카노르라고 불리는 그 사내는, 누군가를 찾는 듯이 안개 속을 정처없이 헤매었다. 그런 그의 귓가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명백히 외지인의 것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안개가 낀 날이면 밖으로 잘 나오려 들지도 않을 뿐더러, 혹시나 나오게 된다고 하여도 발소리를 잔뜩 죽인 채 돌아다니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발소리, 아니. 발소리’들’은 제 기척을 감추려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카노르는 왜일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선 발소리들을 향해 빠르고 조용하게 향했다.

 이내 카노르의 눈에 비친 것은 남녀 한 쌍이었다. 연하늘빛 머리의 아가씨와 구릿빛 피부에 검은 머리의 청년. 둘 다 키가 제법 컸고 소매 아래로 드러나는 팔에는 근육이 제법 붙어있었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조금 배제할법도 한 상대였다. 특히, 연하늘빛 머리를 폴어 길게 늘어트린 아가씨의 허리춤에 걸려있는 묵직한 메이스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카노르는 딱히 고려할 선택지가 없었기에 그들에게 접근해, 메이스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카노르의 손목은 억센 구릿빛 손에 잡혀 있었다. 연하늘빛 머리의 아가씨-에스트레아 페른-와 마주보고 있던 사내-샤흐나즈-가 카노르의 손목을 낚아챈 것이다.


 “이런 거 하나 눈치 못 채나? 말만 길드장이군.”

 “눈치 못 채서 가만히 있던 거 아니거든.”


 에스트레아는 도끼눈을 뜨고 샤흐나즈에게 으르렁 댄 후에 카노르를 향해 돌았다.


 “안녕, 예쁜 오빠?”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꽤나 예상키 어려운 말이었다. 에스트레아는 만면에 미소를 띄워올리며 웃었고 카노르는 그 모습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처음보는 반응이었으니.


 “내 메이스가 탐났던 거야? 미안하지만 못 주겠는걸. 이거 지금 내가 쓰는 거거든.”


 에스트레아는 그렇게 말하고 킬킬대며 웃었다. 


 “예쁜 오빠. 나는 지금 만날 사람이 있어서 오빠랑은 못 놀아줘. 그러니 방해하지 말아줄래? 일이 끝나면 실컷 놀아줄테니까.”


 에스트레아는 말을 마치는 그 순간까지 생글대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말 뒤에는 분명히, 건들지 마.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으며 그 말은 엄밀히 말하자면 협박에 가까운 것이었다. 카노르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펴고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매달았다.


 “내 이름은 카노르야.”


 그는 그것만을 짤막하게 말하고선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분명 다른 자들이 잔뜩 뭐라고 쏘아대겠지만 별로 상관 없었다. 저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허나 그들을 그곳으로 데려가 희생양으로 삼거나 자신과 같은 일을 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제 손으로는. 카노르는 정말로 오랜만에 흥미를 느꼈다. 다른 처형자들에게 저들의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조금은 통쾌한 결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그는 정말로 강해 보였으니까. 카노르는 그대로 천천히 강가를 향해 걸었다. 문득 그의 귓가에 여자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에스트레아 페른이야-!”


 카노르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평소보다 좀 더 짙어진 듯도 했다.

'자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르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리루미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꼬모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ROSE 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블링크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에스트레아는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길을 걷고 있었다. 귀에 아직도 아바리스의 잔소리가 왕왕 울리는 것만 같았다. 제길, 변태 하나 집어던진게 잘못이라고? 그 녀석은 오트리스를 모욕했단 말이야. 에스트레아는 연신 투덜투덜거리며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된 이상 술이나 잔뜩 먹고 들어가서 골탕먹여주지. 그녀의 입가가 기묘하게 비틀려올라갔다. 누군가를 골탕먹일 궁리를 할 때 자주 짓는 미소였다.

 술집 안은 언제나처럼 용병들로 가득했다. 에스트레아는 가벼운 인사를 건네며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녀 앞에는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아일라실과 검은 페도라를 쓴 처음 보는 사내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손짓으로 웨이트리스를 불러 맥주를 주문하고선 안주거리로 나온 땅콩을 아일라실에게 집어던졌다. 아일라실은 땅콩을 솜씨 좋게 받아먹고선 능청스럽게 에스트레아를 바라보았다.


“그 괴랄한 모자는 또 어디서 가져온 거야?”

“괴랄하다니, 이 모자는 곧 대단한 유행이 될거라고.”

“괴랄해.”


에스트레아는 단호히 말하고선 키득대며 웃었다. 아일라실은 머쓱한 듯 모자의 챙을 만지작거렸다. 그 때 그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검은 페도라의 사내가 모자를 벗고 에스트레아에게 말을 걸었다.


“이 모자 역시 괴랄하게 보이시나요, 레이디?”

“…앙? …뭐, 아니 그 정도는 아니지만 꽤 불편해보이네.”


에스트레아는 대충 대답하고 땅콩을 몇 개 오독오독 씹어먹었다. 그녀의 손이 땅콩 그릇으로 내려가는 순간 검은 페도라의 사내가 그녀의 손을 잡았고, 에스트레아는 기겁하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어느 새 다시 모자를 쓴 채였다. 페도라의 챙 아래로 검푸른빛의 머리카락이 내보였다.


“레이디의 이름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가 가질 수 있을까요?”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고, 객관적으로 생각하기에 꽤나 듣기 좋은 목소리였으나 에스트레아는 그것보다 우선하여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잡은 손을 탁 털어냈다. 티는 내지 않으려 했지만 입술 새로 새어나오는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손을 잡지 않으면 이름을 물을 수 없나보지?”

“저런,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불쾌하셨다면이 아니라, 불쾌해.”


그녀는 으르렁대듯이 일갈하곤 어느새 나온 맥주를 들이켰다. 사내는 그런 에스트레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모자까지 벗어보였다.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레이디.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일이 이 주점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식으로 사죄하는 사람이 드나드는 주점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주점 안에 있는 대부분 사람들의 눈이 그와 에스트레아가 있는 탁자로 향했다. 에스트레아는 질겁하며 그에게 손사래를 쳐 보였다.


“제기랄, 됐어. 됐다고. 앉아!”


그에 그 사내는 빙긋이 웃으며 에스트레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에스트레아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앉아버렸고, 그는 그런 그녀를 보며 연신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에스트레아는 괜시리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런 남자는 뭐랄까 조금, 거북스러웠다. 동족혐오라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  에스트레아는 작게 킥, 하고 웃어버렸다. 그 미소에 사내의 미소가 살짝 이지러졌지만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내는 이지러졌던 미소를 가다듬고서 에스트레아를 향해 다시 한번 환히 웃어보였다.


“레이디는 무슨 일이 있으시기에 이 낮부터 맥주를 마시고 계신지 물어도 될까요?”

“너, 진짜 나한테 관심이 많네. 있지. 내가 늘 생각하는 게 있는데, 상대의 이름을 물을 때는 먼저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게 맞는 거고 내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싶으면 네게 무슨 일이 있는지 먼저 말하는 게 맞지 않아?”


에스트레아는 속으로 키득대며 사내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본래 이 말은 길드에서 도도하기로 이름높은 세실리아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에스트레아는 마음 속으로 세실리아에게 감사하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내의 미소가 이지러질 것을 기대하며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기대는 보기좋게 빗나갔다. 사내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진 것이다.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 이름은 센. 꽤나 실력있는 마술사입니다.”

“보통은 자기 실력을 그렇게 높여 부르지 않는데 말야?”


에스트레아가 빈정대듯 말했지만 센은 전혀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이 정도가 낮추어 부른 거라면 이해해주시겠습니까, 레이디?”

“하하, 그런 거 치곤 그리 유명하지 않은가봐? 이곳에 있는 사람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걸?”

“레이디의 그 날카로운 말이 조금은 사실 같아서 마음이 아프네요. 제게 좋은 자극제가 되겠어요.”

“말 은근슬쩍 돌리는 건 수준급이라는 건 알겠네. 인정해줄게.”

“하하, 그럼-어떻게 해야 레이디께서 제 말을 믿어주실까요?”

“아아-그보다 잠깐. 내 이름은 에스트레아 페른이야. 그러니까 더 이상 그 빌어먹을 레이디라고 부르지 말아주겠어? 온 몸에 소름이 돋거든.”

“소름이 아니라 달콤한 전율이었으면 제가 조금 더 기뻤을 텐데요, 에스트레아.”

“꿈 같은 소리하고 있네.”


에스트레아는 깔깔대고 웃으며 탁자에 제 발을 올려놓은 채 센을 바라보았다.


“보여 봐.”

“..흐음?”

“네가 네 말대로 그렇게 대단한 마술사라면, 증명해보라고. 그 대단한 마술로 말이지.”


주점 안에 작은 비웃음소리가 떠돌았다. 에스트레아와 센의 대화가 워낙 신랄했던 탓에-엄밀히 말하면 에스트레아가 한 말만 신랄했지만-주점 안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대화를 듣고 있던 탓이었다. 그들은 센이 마술사라는 것을 믿고 있지 않았다.


“…흐음-.” 


센은 주점 안을 둘러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검은 손수건을 하나 꺼내었다. 그는 손수건을 에스트레아에게 보여주었다.


“앞 뒤, 다 완벽한 흑색이죠?”

“어엉, 그러네.”


에스트레아는 짐짓 심드렁한 태도를 취하며 발을 까딱까딱거렸다. 센은 손수건을 손 위에 올려두고 입김을 후- 분 뒤에 손수건을 공중으로 던져올렸다. 손수건은 허공에서 살랑살랑거리며 서서히, 서서히 떨어져내렸다.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그 떨어져내리는 손수건으로 향했다. 에스트레아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흑색이었던 손수건이 다른 색을 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일순간, 센은 그 손수건을 낚아채어 주먹 안으로 감추었다. 그리고 주먹 위에 입술을 가볍게 얹어 제 입김을 한 번 더 불어넣었다. 팡, 작고 귀여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다음 순간, 센은 에스트레아에게 백색 독수리를 내밀고 있었다. 독수리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파득거렸기에, 에스트레아는 의식하는 것보다 먼저 독수리를 받아들었다. 독수리는 그녀의 손에 들어가자 마치 그녀를 위해 이 곳에 있다는 듯 얌전해 져서 그녀의 어깨에서 날아가지도 않고 얌전히 앉아있었다. 


“이건 좀 신기하네-“

“오오, 형씨 은근 재능있구만? 대단하네. 신기해.”


주점 안은 순식간에 왁자해졌다. 다들 센을 향해 대단하다며 한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센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지만 아까부터 조용히 에스트레아의 옆에 앉아있던 아일라실만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센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에게서는 지나칠 정도의 자만심이 묻어나온다고 아일라실은 생각했다. 어딘가 마음 한켠에 걸리는 느낌. 아일라실은 자신의 직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에스트레아는 독수리가 마음에 들었던 듯, 연신 독수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자, 이제 인정해주실 건가요, 에스트레아?”

“흐음, 그러지 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씨익 웃어보였다. 센이 처음으로 본 그녀의 제대로 된 미소였다. 그에 센은 입을 열어 그녀의 미소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에스트레아는 ‘내가-참아주지’ 와 ‘듣다보니-칭찬-은근-괜찮네’ 정도의 표정으로 센의 칭찬을 듣고 있었다. 센이 한참동안 칭찬을 퍼붓듯이 하다가, 목이 말라져 주방으로 물을 청하러 간 동안 에스트레아는 느긋하게 상체를 뒤로 제끼고 앉아서는 콧노래를 흥흥거리며 독수리의 날개깃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있었다. 아일라실이 입을 살며시 열어 에스트레아를 불렀다.


“..에스트레아.”

“왜?”

“지금, 보고 있는 건가?”


굉장히 수수께끼 같아 영문 모를 이 말에, 에스트레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장까지 돼서 이 정도의 시선을 못 느끼면 벌써 백번은 땅에 묻혔다구.”


그녀의 어조에는 웃음기마저 묻어났다. 전혀 긴장하지 않는 듯한 그 모습에 아일라실은 작게 픽, 하며 웃었다.


“그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

“아아, 응.”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센이 탁자로 돌아왔고, 에스트레아가 말한 그 ‘시선’의 주인은 사라졌다. 전혀 살기를 담고 있던 시선도 아니었고, 딱히 에스트레아 자신을 노린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에스트레아는 그 사실을 머릿속 한 구석으로 치워두었다. 

 그 뒤로 센과 에스트레아는 1시간 가량 더 대화를 나누었다. 그 시간 동안 시선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별다른 일도 없었다. 에스트레아는 그 1시간 동안 맥주를 일고여덟 잔 정도 들이켜댔고, 그 사실을 듣고 격분해서 달려온 아바리스에 의해 끌려가듯이 길드로 돌아갔다. 헤어질 때 센은 에스트레아의 손등에 가볍게 입맞추었고 주위의 예상과 다르게 에스트레아는 센의 얼굴을 후려갈기지 않았다. 센은 에스트레아와 아일라실, 아바리스 등이 레어로 돌아간 후, 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에스트레아나 아일라실처럼 감각이 예민하지 않은 그는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눈치를 채고도 무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에 앉아 커피만 홀짝홀짝 마셔대었다. 

 그 시각 주점으로 향하던 사내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길을 뛰어가는 검은 머리의 아가씨를 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그 사실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자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루미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도랏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ROSE 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블링크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쇼우비츠보미  (0) 2017.11.10

언제나와 같은 오후였다. 적당히 시끌거리는 마을.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서로를 향해 장난을 치며 이따금씩 내지르는 웃음기 섞인 비명소리, 거리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사이로 조금은 이질적인 이가 하나 눈에 띄었다. 그는 무엇을 찾기라도 하는 듯이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다녔다. 특히 젊은 아가씨와 함께 있는 사내를 볼 때면 그의 은빛 눈동자는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매의 그것처럼 빛났다.


“어, 리안 씨. 오늘도 라퀴엠 씨를 찾고 있나요?”


그런 그에게 말을 건 것은 붉은 머리의 소녀-엄밀히 말하자면 소녀와 아가씨의 경계에 있는-였다. 그녀는 방금까지 대장간에 있다가 나오기라도 한 듯 얼굴과 손, 옷에 검댕 같은 것이 잔뜩 붇어있었다. 리안은 그런 그녀에게 눈길을 슬쩍 던지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또 사라져서 곤란한 차였거든요. 혹시 라퀴엠 님을 보셨습니까, 베일엑스 양?”

“카트린이랍니다, 리안 씨. 차라리 카트린 군이라고 불러줄래요? 그 편이 더 익숙해서요. 아, 오늘은 못 봤어요. 마을에 오지 않은 것 같은데요?”


베일엑스 양이라고 불린 카트린 베일엑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깨에 닿을 듯 말듯한 짧은 붉은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리안은 그 대답을 듣고선 예의를 갖추어 정중히 인사했다.


“여성은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모습이든 당연히 존중받아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더군다나 베일엑스 양처럼 올곧은 정신을 가지신 분이라면 더더욱이 그렇지요. 그러한 연유로 베일엑스 양의 청은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카트린은 어쩔 수 없단 듯 킥킥대며 웃고선 리안을 향해 가벼운 목례로 인사하고선 다시 제 갈길로 가버렸다. 리안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도망을 치면 거의 대부분 여자를 만나러 가는 라퀴엠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여자를 짝으로 맞이하고 싶어해 역시 대부분 인간의 마을로 도망오는 라퀴엠이었다. 그런 그가 인간의 마을에 오지 않았다니. 보통의 경우라면, 리안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봤을 것이나 카트린 베일엑스의 답을 들은 이상 더 물어봐도 소득이 없다고 결론내렸다. 괴팍한 드워프 대장장이의 조수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그녀의 말에 의하면 조금 비밀스러워보이고 싶기에 비밀에 부친-여러 경로를 통해 마을의 일과 흥미있는 일에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없다, 라고 하였으니 확실히 이 마을에는 오지 않은 것이겠지. 그렇다면 남은 곳이라고 할 것도 없다. 리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또 그곳인가.

꽤나 깊은 숲속이었다. 인간의 발걸음이 닿는 일은 굉장히 드문 곳이었기에 흙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으며 여타 소음들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로지 들려오는 것은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갈때마다 나뭇잎들이 재잘거리는 사그락 소리와 새소리뿐이었다. 그저 나무와 풀과 바람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완전할 것 같은 공간 속에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듯하게 보일 정도로 강렬한 사내가 서 있었다. 남색의 머리를 약간 길지만 단정하게 기른 그는 무엇인가를 기대하기라도 하는 듯이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를 찬연히 빛냈다. 그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입술을 열었다.


“아름다운 메디. 거기에 있죠? 다시 한번 당신의 그 아름다운 보랏빛 눈을 볼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지 좀 말라고 했을텐데요. 그리고 대체 언제 들어먹을 거죠? 제 이름은 메디가 아니라 메두사라고 했을텐데요. 라퀴엠 씨.”


라퀴엠이라 불린 남빛 머리의 사내는 나무 그림자에서 나타난 칠흑같이 어두운 머리의 여인을 보고서는 만면에 미소를 피워내었다. 가지런한 흰 이빨이 나뭇잎 새로 새어들어온 햇빛을 받아 빛을 내었다. 메두사는 그런 그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벌써 이게 몇 년째인지. 인간의 세대로 쳤을 때 수 세대 정도는 가뿐히 지났을 시간 동안 질리지도 않고 그녀를 찾아오는 사내였다. 이쯤 되면 질릴 때도 되었을텐데.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퀴엠은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두어 발자국 다가섰다.


“메디, 오늘은 제 이름을 불러주는군요. 기쁘기 그지없네요. 그래서?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나요? 당신이 가고 싶은 곳이라면 그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가도록 하겠고, 당신이 원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어떤 일을 벌여서라도 가져오겠어요. 그러니 제게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줘요, 사랑스러운 메디.”

“누누히 말했지 않나요. 제가 원하는 것은 그대가 이 우습지도 않은 짓을 집어치우는 거예요. 그대의 원나잇 상대가 될 생각은 없다고 했을텐데요. 그리고 그 어조 이상해요. 그만두시죠. 평소가 그나마 더 낫습니다.”

“이런, 그런가. 캣의 말이 틀렸군. 캣이 틀린 건 처음인걸?”


라퀴엠은 키득, 가벼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볼을 가볍게 긁적였다.


“캣이라니, 누구죠?”

“아,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 마을에서 일하는, 드워프네 조수. 헤에, 왜? 내가 그 애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싫어? 질투-라는 걸까나, 메디?”

“우스운 소리. 오히려 라퀴엠 씨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이쪽에선 감사할 따름이예요.”


메두사는 날카로운 시선을 살며시 떨구어 제 발치를 돌아다니는 뱀을 바라보았다. 라퀴엠은 그 모습까지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선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띄워내었다. 메두사는 잠시동안 뱀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라퀴엠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어라고 하였길래요?”

“여자들은 정중하고 무게감있는 남자들을 좋아한다더군. 아, 다정한 남자도 좋아한다고 했어. 존댓말을 하면 반응이 좋을 거라고 했는데.”

“그녀가 사람들에겐 전부 개인차가 있다고 안 하던가요?”

“아, 그 말은 메디는 존댓말이 취향이 아니라 이런 평소의 내가 취향이라는 말인가?


라퀴엠은 질리지도 않는 듯 씨익 웃으며 메두사에게 한발 더 다가갔다. 메두사는 정말 질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보다가 작게 키득 웃어버렸다. 그녀의 미소가 라퀴엠의 눈에 비쳐지자 라퀴엠의 미소 역시 한결 더 깊어졌다. 그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미소를 먼저 지워버린 것은 언제나처럼 메두사였다. 메두사는 그로부터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손등으로 볼을 살짝 부볐다. 그녀는 다시금 시선을 라퀴엠으로부터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돌아가세요. 곧 언니들이 나올텐데 복잡한 일이 생기는 것은 원치 않으니까요.”

“…흐음, 왜? 나는 오늘 여기 있으면서 상견례까지 마칠까 싶은데.”

“라퀴엠. 저 농담하는 거 아니예요.”


메두사는 살짝 눈을 치켜뜨며 라퀴엠을 바라보았다. 라퀴엠은 그것마저도 좋다는 듯 싱글싱글 웃고만 있었다. 라퀴엠은 메두사의 볼이 아까보다 더 발그스레 해졌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 사실을 구태여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 때였다. 라퀴엠의 뒤편에서 낙엽을 밟는 바스락 소리가 난 것은. 라퀴엠은 순간적으로 몸을 확 긴장시키며 메두사가 있는 쪽으로 제 몸을 날려 메두사를 제 등뒤로 돌려 그녀를 보호하는 듯이 서고는 소리가 난 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음기를 잔뜩 머금고 있던 푸른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서, 할 수만 있다면 그 소리를 낸 무언가를 눈빛으로 찔러 죽일 수 있을것만 같았다.


“뭐하는 놈이냐.”


목소리 또한 변했다. 방금까지 메두사와 대화하던 때의 라퀴엠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다감했고 부드러웠다. 허나 지금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과연 방금 전의 그 사람과 이 사람이 동일인물인지 조금 혼란스러워질 정도로 냉막하고 차가웠으며 착 가라앉아있었다. 메두사는 그가 자신을 지켜주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그렇게 싫지는 않은지 그의 뒤에서 앞쪽을 빼꼼히 넘겨다보고 있었다.


“리안입니다.”


리안이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이곳으로 오는 길을 조금 서두른 것인지 늘 단정하던 그의 머리와 옷차림은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그 단정하던 머리에 붙어있고 꼽혀있는 나뭇잎을 보고 있자니 라퀴엠은 형형하게 내뿜고 있던 기운을 누그러뜨리고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평소 흐트러지지 않는 사내의 흐트러진 모습만큼 보기 좋은 것도 없으니 말이다. 라퀴엠은 키들키들거리며 웃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메두사를 지키는 듯이 서있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설령 그의 앞에 지금은 오랜 전설이 되어 이야기의 저편으로 사라진 에인션트 드래곤이 나타난대도 여전히 이렇게 메두사를 보호하는 듯 서있을 것마냥 단단히 서 있었다. 리안은 자신의 모습을 보자마자 라퀴엠이 웃음을 터트리자 제 눈썹을 가벼이 치켜세웠다.


“뭐 우스운 것이라도 보신 듯한 태도로군요.”

“하하, 하하하하! 아니, 그냥 좀 평소에 보지 못하던 모습이라 기분이, 으흐흐, 유쾌해졌을 뿐이야!”

“그 수준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 즐거워하는 모습.”

“하하하! 이야, 역시 리안은 눈치가, 하하! 빠르다니까?”


라퀴엠은 능청스레 답하고선 제 머리카락 쪽을 살짝 가르켰다. 리안은 그제서야 제 머리에 나뭇잎이 붙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지 약간 머쓱한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내려 나뭇잎을 떼어내었다. 메두사는 리안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있었기에 라퀴엠의 뒤에서 살며시 걸어나왔다. 리안의 눈과 메두사의 눈이 마주쳤고 그들은 서로를 향해 예의를 갖추어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좋은 오후입니다, 메두사 양.”

“네, 좋은 오후네요. 리안 씨.”

“라퀴엠 님이 귀찮게 굴거나하진 않으셨습니까.”

“평소와 같았답니다.”

“오늘도 실례를 범하고야 말았군요. 사죄드립니다.”


리안은 고개를 깊게 숙여 메두사에게 사죄를 표하듯이 인사했다. 라퀴엠은 그런 모습을 보며 입술을 살며시, 메두사에게 보일 정도로만 삐죽거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입술을 삐죽이는 모습을 보고 살며시 미소를 머금는 메두사를, 라퀴엠 그 자신은 보지 못했다. 리안은 다시금 허리를 펴고 딱 바른 자세로 섰다. 그의 눈동자가 라퀴엠을 똑바로 향했다.


“이런 말씀 드리면 또 싫어하시고 도망치려 하실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해야겠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몇 개 있습니다. 지금 당장 저랑 같이 가시죠.”

“내가 그 말에 뭐라도 대답할지도 알고 있겠지, 리안?”

“라퀴엠 님 또한 제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고 계시겠지요.”

“내가 그 반응에 반대할거라는 것도 뻔한 이야기고 말이지.”


라퀴엠은 싱글싱글 웃으면서도 리안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메두사가 작게 한숨을 쉬며 라퀴엠의 어깨를 두어번, 가볍게 두드렸다.


“응? 왜 그래, 메디. 이 내 얼굴을 그렇게 또 보고싶었던 거야? 으응, 그런 거였다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나는 하루 종일 메디만 바라봐줄 수 있으니까 말이지.”

“꿈이라도 꾸는 건가요, 라퀴엠 씨? 그럴리가 없잖아요.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리안 씨를 따라서 할 일을 하고 오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당장 가버릴 테니까요.”

“아아, 새치름한 고양이 같은걸, 메디-.”

“메두사 양도 저렇게 말씀하시는 데 안 갈 생각이십니까.”


리안의 표정은 언제나와 같이 약간은 무덤덤하게, 바위처럼 느껴지는 표정이었지만 왠지 지금만큼은 평소와 다르게 약간 희열을 머금고 있는 듯도 했다. 드디어 라퀴엠을 찾아서, 별다른 저항 없이 데려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리라. 평소 같았으면 마을을 네다섯바퀴 정도는 기본으로 돌고, 노점상을 두어 군데 정도 파손시킨 후에야 라퀴엠을 데려갈 수 있었던 리안이니, 이렇게 평화로운 해결은 당연히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싶을 것이리라. 라퀴엠은 리안의 표정에서 미묘하게 느껴지는 희열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항복한다는 듯 양 손을 들고 가벼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알았어. 갔다오면 되잖아. 대신 갔다가 다시 오면 말이지. 반겨줘야 해, 메-디 쨩.”

“으, 또 이상한 말투네요. 흐음…알았어요. 약속할게요.”


메두사는 라퀴엠의 말에 살며시 미간을 찌푸리는 것 같다가도 이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퀴엠은 그 모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선 콧노래를 부르며 리안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리안은 메두사에게 가볍게 목례하고선 그런 라퀴엠의 뒤를 따랐다. 메두사는 잠시 가만히 서서 멀어져가는 라퀴엠과 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신경쓰이는 일을 처리한달까, 그래도 되겠지. 메두사는 머리를 살며시 가다듬고 마을로 가는 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리안과 라퀴엠은 산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한동안 별다른 말이 오가지는 않았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굉장히 놀랍게도 리안이었다.


“이쯤 되었으면 그만 두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진심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라퀴엠 님.”

“…우스운 소리를 하네.”


라퀴엠의 입가가 기묘하게 비틀렸다. 평소같았으면 적당적당히 대꾸했을 그였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진심처럼 보인다라, 이거 되게 웃긴 말이잖아.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진심인 거지?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기만 하면 진심이고 진중한 것인가? 보자마자 반하는 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닌가? 볼 때마다 점점 더 빠져드는 것만이 진실한 사랑인거야? 세상에 진실한 사랑을 무엇으로 판단하지? 아니. 애초에 그것을 판단하려 드는 것이 더 우스운 일이 아닌가, 리안. 나는 그녀에게 정말로 진심이야. 모든 마음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고 있고 다가가고 있다. 그녀가 이런 나를 쉽사리 믿지 않는 것은 이해해.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진심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마. 나는 정말로 진심이니까.”


마을은 적당히 복작거렸다. 메두사는 딱히 남자를 꼬셔내려 내려온 것이 아니기에 메두사는 다시 한번 머리에 둘러쓴 두건을 매만지고 지나가던 이를 붙잡았다.


“어엉? 무슨 일이라도 있는걸까, 예쁜 언니?”


메두사는 가벼이 눈을 깜박거렸다. 짧은 붉은 머리, 방금까지 풀무질이라도 하다 온건지 몸 이곳저곳에 가득한 검댕이 가득했다. 키도 메두사보다 컸고 무엇보다 그 사람의 몸은 꽤나 다부졌고 몸 군데군데 상처도 있었다. 그랬기에 메두사는 당연히 그 사람이-조금은 마른 편의-남자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 사람의 목소리가 꽤나 유쾌한 아가씨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고선 놀랄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예쁜 언니라니, 묘하게 라퀴엠을 연상시키는 어조였기에 그녀의 놀람은 더해질수밖에 없었다. 


“아, 아. 이 마을에 혹시 캣이라는 애칭을 가진 사람이 있나요?”

“캐-앳? 그거 난데, 날 왜 찾아?”


메두사는 한번 더 놀랄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이 그 캣이라는 건가. 라퀴엠과 꽤 친하던 것 같아서 잠시 얼굴이나 볼까 하고 온 것이었는데 마침 말을 건 것이 그녀 자신이었다니. 메두사는 당황한 모습을 숨기려 애쓰며 그녀를 살며시 바라보았다. 여러모로 아름답고 여성스럽게 예쁘다, 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잘생겼다, 가 어울릴 정도로 시원시원하게 생긴 이목구비였다. 메두사는 마음 한켠에 있던 찜찜함이 없어지는 것을 느끼고선 혼란스러워했다. 자신은 과연 무엇을 찜찜하게 여기고 있던 것일까. 이 아가씨와 라퀴엠이 혼인이라도 할까봐 불안해했던 걸까? 메두사는 입술을 살짝 앙다물었다. 당황스러웠다. 자신은 그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는 위치인가? 몇 번을 생각해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 로 돌아왔기에 메두사는 좀 더 초조한 듯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언니,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누가 고민이 있으면 캣이라도 찾아가라고 한 거야?”


캣이라는 소녀, 메두사와 마주 서 있는 그 소녀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녀를 길 한켠에 있는 벤치로 안내했다.


“제대로 상담은 못 해줄거 같아 아쉽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얼마든지 말해줘.”

“…별거 아니예요. 그저 우연. 당신의 이름을 우연히 듣고 흥미가 조금, 생겨서.”

“에엥, 이름만 듣고 흥미가 생긴다구? 좋아하는 남자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기라도 한 거야?”

“아니예요, 좋아하지 않아요.”

“흐응, 정말이야? 일단은 누군가의 대화에서 내 이름이 나왔는데 그 사람에게 물어보지 못했다는 거네. 그 사람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는 거 싫었던 거지?”


캣은 벤치에 편안하게 기대앉았다. 그녀는 연신 싱글싱글 웃고 있었고 그럴수록 메두사는 금방이라도 달아오를것만 같은 볼을 감추는데 급급했다.


“뭐, 그럼 약간 흥미가 가는 사람이라고 해둘게. 그래서 언니의 고민은? 이 내가 그 남자를 낚아채갈까봐 불안해서 염탐하러 온 거야?”

“그럴리가 없잖아요. 오히려 당신이 데려가주면 이 쪽은 감사라구요.”

“어라라, 정말이려나? 그럼, 언니의 삶에서 그 남자를 완전히 배제하고 생각할 수 있어? 나는 질투심이 무-척 강하니까 언니의 그 사람을 만약 내가 데려간다면 앞으로 얼굴도 못 볼지도 모르는데.”


캣은 메두사의 의중을 꿰뚫어볼 듯한 태도를 취하며 싱글싱글 웃었다. 메두사는 두건을 다시 고쳐쓰며 볼을 슬쩍 문질렀다. 자신은 과연 라퀴엠을 완전히 제 삶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있을까? 메두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눈 쪽을 감쌌다.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네-. 있지. 더 늦게 가면 분명 우리 아저씨가 엄청 화낼거야. 안 그래보여도 엄청 걱정하니까 말이지. 그러니 먼저 가볼게. 마지막으로 이 말만 하고!”


캣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 엉덩이 쪽을 탁탁 턴 뒤 메두사의 앞에 똑바로 서서 씨익 웃었다. 금갈색 눈동자와 보랏빛 눈동자가 마주쳤다.


“사랑하는 지 아닌지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해. 그럴때는 이렇게 생각해봐. 지금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말이지, 그 누가 와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거라고. 만약 흔들린다면 그건 단순한 호감. 사랑은 아니란 소리야. 너무 엄격한가?”


캣은 그 말을 마치곤 까르르 웃으며 뛰어가버렸다. 메두사는 그녀의 그 말을 곰곰히 곱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연 라퀴엠 그는, 자신에게 진심인 것일까? 그래서 그녀가 그를 받아주면 그녀와 그는 행복할 수 있을까, 영원히? 인간에 비하면 영원 영구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사는 그들이었다. 그렇기에 그 질문은 더 절실했다. 남은 여생동안 그들이 서로만을 사랑할 수 있을것인가? 그 답은, 그녀 혼자서는 내릴 수가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그녀가 있던 곳으로 가는 발걸음을 옮겼다.

숲은 언제나처럼 고즈넉했다. 바람이 사그락 소리와 새의 소리만이 가득찬 듯이 보이는 그 곳. 메두사의 보랏빛 눈동자는 그 숲 안쪽에서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했다. 진한 남빛의 머리카락-. 그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메두사는 그가 있는 공터 한가운데로 걸어갔고, 그는 고개를 돌려 메두사를 바라보며 활짝 웃어보였다.


“어디 가버린 줄 알고 걱정했어.”

“가면 어딜 간다고 걱정해요? 이래봬도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래도 걱정되는 게 사랑이라는 거지.”


라퀴엠의 미소는 언제나와 똑같았다. 그 미소를 보자 메두사는 마음 한 켠을 꽉 메우고 있던 고민과 걱정이 조금 정도는 풀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뭐, 아직 그를 받아줄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조금 정도는 더 마음을 열고 그의 말을 들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메두사는 그를 향해 가벼이 웃어보였다.


“또 똑같은 소리예요.”

“아, 싫다면 다른 말로 바꿀게. 뭐가 좋겠어?”

“싫다는 말은 아니예요. 아, 좋다는 말도 아니니 괜한 기대는 말아주세요.”

“아, 분부대로.”


라퀴엠은 마냥 좋은지 그녀를 향해, 그녀와 눈을 맞추고 환히 웃어보였다.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메두사도 그와 시선을 맞춘 채 웃어보였다.

'자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랏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꼬모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블링크님 커미션 샘플용  (0) 2018.07.18
쇼우비츠보미  (0) 2017.11.10
아름다운 네게.  (0) 2017.11.08
1 2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