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에녹스 언니는 완벽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만 해!”


언제나처럼 카르민은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열성적인 태도로 말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그녀의 말을 들은 아루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리더에게도 너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다. 이쯤에서 그만하고 돌아가는 건 어떤가.”


무신경한 말투였지만 그 속내에서 약간의 걱정이 내비쳐보였다. 뭐, 그 걱정이 카르민을 향한 것인지 에녹스를 향한것인지는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아루카가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하자 카르민을 눈을 치홉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에녹스 언니가 밖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지 않고 돌아가자는 말을 할 수 있어? 제정신이야? 언니의 모든 모습을 이 내 눈에 하나하나 담아도 보고싶은 마음은 채워지지 않을 정도로 모자라고 모자란데!”

“…됐다, 나는 그만 돌아가겠어.”


아루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선 뒤돌아 걸어갔다. 카르민은 흡사, 굴러들어온 복을 제 발로 걷어찬 가련한 이를 보듯이 아루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다시 에녹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키도 크지 않고 몸매가 두드러지게 빼어난 것이 아니라 언뜻 지나가며 본다면 어린 아이라 볼 수 있을 정도의 외형과 외모였지만-그리고 실제로 카르민 역시 그녀를 정면에서 꼬맹이라 부른 적이 있다-현재 카르민의 눈에 에녹스는 지금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워보였다. 그렇기에 카르민은 에녹스의 근처에 다가가는 모든 이들,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는 모든 이들을 그 이유 하나, 그녀와 같은 공간 안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질투하며 속으로 분노를 불태우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을 전부 쫓아내고 이 공간 안에 그녀와 자신 단 둘이 있고 싶은 카르민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을 저질렀다간 그녀와 다시는 함께 있을 수 없으리란 것을 깨닫고 있었기에 꾹 참고 그녀를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하는 그녀였다.


“아, 에녹스 경!”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 카르민은 눈을 번쩍이며 주변을 살폈다. 대체 어떤 놈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지? 에녹스를 응시할 때면 하트라도 튀어나올 듯한 달콤함이 흐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형형한 살기가 뿜어져나왔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 짧게 다듬은 검은 머리카락.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그는 카르민의 눈빛에 의해 10번 정도는 족히 죽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카르민이 있는 곳에서는 그들의 대화가 들려오지 않았다. 애초에 카르민이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운 것도 아니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생각은, 하고 있는 생각은 오로지 ‘감히 에녹스에게 말을 건 저 녀석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 이것 하나뿐이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을때 그 남성이 에녹스에게 작업을 걸거나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카르민에게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에녹스에게 말을 건 것만으로도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수작을 걸었다고 보고 있는 그녀이니 말이다.

대화는 그다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사내는 곧 쓰고 있던 모자를 멋들어지게 한 번 들어올려보이고선 에녹스에게 등을 보이고 걸어갔다. 카르민은 속으로, 계속 에녹스의 곁에 있지 못하는 것에 대해 에녹스에게 사과하고선 사내를 살며시 따라갔다.

사내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휘파람을 휙휙 불며 걷고 있었다. 발걸음은 경쾌했고 발소리는 컸다. 그랬기에 카르민은 들키지 않고 사내의 뒤를 밟을 수 있었다. 이내 사내는 건물 하나의 문을 기세좋게 발로 차며 들어갔다. 안에서 어떤 여성의 욕짓거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으나 카르민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길드 이스토리아?”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다. 이런저런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용병길드라지. 일단은 용병 길드지만 정보를 얻어오는 일에 특출난 자가 소속되어 있어 이런저런 정보를 캘 때 유용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카르민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이 곳을, 그리고 3층 창가에 어른거리는 검은 머리 사내의 인영을 기억해두었다. 조금 후에 달이 뜨면, 이곳을 다시 찾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카르민이 달이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탓일까 밤은 생각보다 금세 찾아왔다. 왁자지껄하게 광장을 채우고 있던 사람들의 지절거림은 금세 수그러들었고 광장에는 달빛과, 그 달빛마저 피할 정도로 붉은 눈에서 살기를 피워내고 있는 카르민 뿐이었다. 카르민의 발소리는 조용했고, 빨랐다. 길드 이스토리아는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카르민은 조용하고 소리없이 움직였다. 그런 그녀의 몸놀림은 마치 사냥감을 사냥하는 밤의 제왕, 검은 재규어를 닮아있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것도, 그리고 옥상에서 아까 그 사내의 인영을 본 창으로 내려가는 것 까지는 쉬웠다. 이제 문제는 소리를 내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 사내는 이미 잠이 든 건지 방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카르민은 작은 희망을 품고 창문을 슬쩍 밀어보았다. 대체 청소를 안 한지 얼마나 된 건지, 창문은 잠시 저항하는 듯 싶다가 퀘퀘한 먼지를 슬슬 뱉어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창문조차 점검하지 않고 자다니, 이 얼마나 멍청한 행동인가. 카르민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방 안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다. 달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비췄다. 달빛이 비친 흰 시트와 흰 베개. 배게 위에 아까 그녀가 태울듯이 노려봤던 사내의 머리가 놓여있었다. 카르민은 다시 한 번 형형한 안광을 흩뿌리며 검을 빼들었다.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검이 사내를 향해 내리쳐졌다.

사방으로 튀었을 거라 예상되는 피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방금까지 베개 위에 얌전히 놓여있던 사내의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카르민은 나직하게 으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주변을 살폈다. 검에 의해 작살난 침대의 반대편 끝에, 능글맞은 미소를 걸친 검은 머리 사내가 앉아 있었다.


“나에 대한 애정 표현이 굉장히 격하네, 세케림.”

“..뭐라는 거야.”


카르민의 입술에서 싸늘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소리 없지만 강하게,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지만 이번에도 맞지 않았다. 사내는 그녀의 공격을 꽤나 여유롭게 피하고 있었다.


“저런, 정말 죽일 생각인가보네. 이유라도 알려주지 그래, 발름?”

“내 것에 집적거린 죄다.”


카르민은 짧게 답하고 다시 한 번 발을 구르며 사내를 향해 돌진했다. 아까 멀쩡하게 남아있던 침대가 한번 더 박살났다. 그 요란한 소리에 길드의 사람들이 깨어난 듯 했다. 문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르민은 혀를 쯧, 하고 가벼이 찼다. 누군가 그의 방문을 두드리며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낮에 험한 욕설을 내뱉었던 여자의 목소리. 카르민은 검을 검집에 넣고 창문으로 뛰어가 늘어트려두었던 밧줄을 타고 순식간에 옥상으로 다시 올라가, 달아났다. 이런 곳에서 잡히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

 밤은 짧았다. 침대에 돌아온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해가 아침을 알리고 있었다. 카르민은 찝찝한 기분을 덜기 위해 에녹스의 초상화-거리의 화가가 대강 그린 것이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를 두세번 꼼꼼히 살펴보고 자리에서 나왔다. 어제 밤에 방에 남겨져있던 쪽지에 오늘 에녹스가 전체적으로 할 말이 있다고 했었지. 단체가 아니고 개인적으로 할 말이었다면 더 좋았을테지만-그래도 아침부터 에녹스의 말을 들을 수 있다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르민, 다음부턴 조금 서두르도록.”


이런, 다들 일찍 일어난 걸까 다 모여있었다. 카르민은 머쓱한 듯 웃었다.


“네, 에녹스 기사단장님.”

“넘어가지. 아루카.”


에녹스가 아루카에게 손짓을 하자 아루카가 저 뒤편에 서 있던 사내를 데리고 모두의 앞에 와 섰다. 카르민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저 녀석이 왜 여기에? 어제 복면과 두건으로 얼굴을 철저하게 가린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어제 밤 카르민이 습격한 사내가 지금 카르민의-엄밀히 말하면 카르민을 포함한 많은 기사단원의-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샤흐나즈 씨.”

“그렇게 딱딱한 호칭이 아니어도 되는데, 세뇨리타.”

“…”


아루카가 말 없이 들고 있던 스태프를 만지작거리자 샤흐나즈라고 불린 그 짜증나는 남자는-오로지 카르민의 시선 한정이지만-어깨를 으쓱거렸다.


“으흠, 그러니까-저는 길드 이스토리아의 샤흐나즈 하룬 할리드입니다. 풀 네임은 더 길지만 오오늘은 이쯤만 말해두죠. 뭐, 제가 선 이유는 별일 아닙니다만. 여러분들의 기사단에 들어오기로 한 신입 아가씨가 계셨는데 말이죠, 조금 일이 생겨버렸습니다. 그래서 합류가 조금 늦어진다는 걸 알려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자세한 건 어제 여기 계시는 기사단장께 일러드렸으니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시고. 아 물론 제 개인적인 연락처는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만.”

“…얼간이.”


뭐야, 작업 거는 게 아니었나? 샤흐나즈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나 지금 카르민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속은 온통 샤흐나즈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에녹스로 가득차 있었다. 그녀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싸늘한 눈빛. 걱정할 필요 없던 거였나. 카르민의 입가에 비실비실 미소가 피어올랐다.

10분 정도 지나고 에녹스에게 줄기차게 싸늘한 눈빛을 받던 샤흐나즈는 키들대며 대금을 주머니에 밀어넣고 가 버렸다. 그때까지 비실비실 웃고 있던 카르민을 에녹스가 조금 걱정된다는 듯 바라보았다.


“..,혹시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아, 아아, 아닙니다, 전혀, 그런게!”


아아, 아까 샤흐나즈 녀석을 쳐다볼 때와는 다르게 약간의 자상함이 엿보이는 눈빛. 카르민은 여태까지중에 가장 환히 웃어보였다.


“전 멀쩡합니다! 에녹스 기사단장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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