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evernote.com/shard/s560/sh/547ba09d-9c13-4b41-acdb-6afd28e69fb6/e6590ef2b61c9c5ab3514d702a4967a9


※트리거 워닝 ; 납치 & 감금


 베로니카가 눈을 뜨고나서 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소설의 서두로 자주 등장하는 퍽 고리타분한 문장이었지만, 현실에서 일어날거라곤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방이었다.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도 4명이 누워도 넉넉할 정도로 거대한 침대였다. 자신이 덮고 있던 포근한 솜이불이 갑자기 눅눅하고 진득한 늪처럼 느껴져, 베로니카는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옷은 어제 입었던 그대로였다. 그래, 어제와 그대로. 그렇다면 여긴 어디고, 왜 자신은 여기 있는걸까.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어제 오후에는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기로 되어있었다. 요 며칠 전까지 하던 알바를 때려쳐서, 급히 구하고 있었으니까. 알바 면접은 갔었나? 갔었지. 가게 안에는 멀끔한 세 명의 신사가 있었다.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습 기간동안 시급을 안 쳐준다는 이야기에 화나서 언성이 높아졌다가 결국 대판 싸웠었고. 그리고...그리고? 그 뒤로의 기억이 없었다. 가정할 수 있는 경우는 납치였다. 납치할 대상을 홀로, 감시의 눈 없이 가둬두는 것은 말이 안 될테지만 지금 상황에서 다른 경우의 수를 떠올릴 수는 없었다. 창문 쪽에 다가서자, 나무들이 보였다. 2층, 어쩌면 3층 쯤일까. 창문으로 뛰어내려서 어쩌면 나뭇가지에 매달릴 수 있을지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문이 스르륵 열렸다.


 "본 조르노 (좋은 아침), 세뇨리따."


 그녀가 움찔하며 돌아본 곳에는 낯익은 사내가 서있었다. 낯이 익다 한들 본디 알던 사이는 아니었다고 하는것이 옳을 것이다. 그는 영국을 대표하는 중년 신사 모델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였으니까. 베로니카는 제 눈을 의심하며 두어번 정도 눈을 깜박거렸다. 사실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탓일까,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아가씨. 꿈이 아니야. 정말로 안토니라네. 안토니 미셸 젠킨스. 세뇨리따들을 위한 신사지."

 "안톤. 에드워드가 기다리고 있어."


 조금은 과장된 손짓으로 자신의 소개를 늘어놓던 안토니를 막은 것은 덩치가 크고 눈매가 매서운 사내였다. 예리한 날카로움의 무서움보다는, 맹수의 그것과 같은 무서움이었다. 그 역시 얼굴을 몇번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누구였더라. -사자왕? 베로니카는 그런 생각을 하곤 실없이 웃었다. 그는 분명 사자왕을 닮기는 했지만 실제 사자왕일리는 없었으니까. 그녀가 미소를 띄우자 사내들의 눈이 전부 그녀에게 쏠렸다. 여기서는 승부를 걸어야겠지. 베로니카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배고픈데. 밥 있어요?"


 사내들은 응당 그렇겠지만, 예상과 반응이 전혀 달라서인지 작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본 것인지 아닌지, 베로니카는 그저 생글생글 미소만 지어보일 뿐이었다. 결국 뒤에 들어온 사내가 그녀의 등에 손을 가벼이 얹고 밖으로 이끌었다. 이 손이 자신을 납치했다고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물어뜯고 달아나고 싶었지만, 이곳이 어딘지도, 출구가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도망쳐봐야 곧 잡힐거라는 걸 잘 알고있는 그녀였기에 꾹 눌러참고, 겉으로는 그저 고맙다는 미소를 흘려내었다.

 아까 침실도 꽤 크다고 생각했는데, 복도에 나와보니 침실은 별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베로니카였다. 거인이라도 사는 걸까 싶을 정도로 천장이 높고 복도가 넓었다. 베로니카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사내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이내 그들은 거대한 창이 있는 응접실로 나왔다. 응접실에 위치한 식탁에는 의자가 4개였고, 그 중 하나에는 이미 누군가 앉아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사내는 백금발을 단정하게 뒤로 넘긴 남성이었다. 베로니카는 그를 보는 순간 '아, 엄청나게 깐깐할 것 같은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응접실로 걸어들어오는 그들의 발소리가 들리자, 사내는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손목시계를 흘끗였다.


 "바로 데리고 오라고 했을 텐데, 안토니, 아서."

 "이런, 충격받은 아가씨를 억지로 끌고 올 수는 없잖아?"


 안토니는 능청맞게 답하고선 사내의 옆에 앉았다. 사내는 한숨을 쉬곤, 식탁 옆에 멀뚱멀뚱 서 있는 베로니카에게 작은 명함을 건네었다. 명함에는 에드워드 밀즈라는 이름과 호프먼 법률 회사 소속의 변호사라는 것이 간결한 필치로 써 있었다. 베로니카가 명함과 그를 멀뚱히 바라보자, 에드워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제 앞의 의자를 가르켰다. 베로니카는 그 손짓을 무시하고 앉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말을 하지 않지는 않았다.


 "거기 써 있는 대로, 에드워드 밀즈다. 어제 널 납치해 왔고."

 "...보통은 그렇게 말 안하지 않나요?"

 "보통이라면 너처럼 그렇게 가만히 있지도 않지. 뭐, 납치해 온 것은 사실이고 그것을 숨길 생각은 없다. 숨긴다고 해서 그 사실이 변하지는 않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야겠지. 앉지 그러나. 이야기가 꽤 길어질 것 같은데."

 "뭐, 가만히 있는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요."


 베로니카는 그렇게 말하곤, 제 앞에 놓인 의자를 들고 창가로 달려갔다. 식탁에 앉아 있던 세 남자가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는 그녀보다 빠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테니스를 하길 잘했어.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창문을 향해 의자를 집어던졌다. 화려한 파열음이 울려퍼지고 유리조각들이 산산히 부서지는 햇살같이 허공을 날았다. 제대로만 뛴다면 나무에 매달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녀를 쉽게 잡을 수는 없을테지. 베로니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세찬 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헝클고 그녀를 향해 매섭게 몰아쳤다. 그녀는 팔을 쭉 뻗었다. 손 끝에 나뭇가지가 아슬하게 닿을만한 거리였다. 조금, 조금만 더-.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불가능해. 베로니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떨구었다. 거대한 연기뭉치가 그녀를 가볍게, 살짝 잡고 있었다. 애초에 연기가 사람을 잡을 수 있을리도 없거니와, 다시 끌고 들어간다는 것은 더더욱 어불성설이었다. 그녀는, 드물게도 겁에 질린 눈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식탁을 박차고 일어난 것은 거짓이었다는 듯이, 신사 셋이 식탁에 앉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기는 그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그 사자왕-아서-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안토니 젠킨스의 손에서는 놀랍게도 가시덤불이 구불구불 기어나와, 창문 아래로 뻗어져 있었다. 미소마저 머금은 안토니를 보자, 그녀는 정말로 두려움이 전신을 갉아먹는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이해하게 되고야 말았다. 두려웠다. 인간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뇌리를 강하게 치고 갔다.


 "이야기가 아직 끝났는데 자리를 뜨는 것이 예의는 아닐텐데."

 "사람을 납치하는 건 대체 어디의 예의인데?"


 에드워드의 말에 베로니카는 적개심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아르릉거렸다. 아직 연기에 허리를 잡힌 채 허공에 가벼이 떠 있는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겁을 먹고 훌쩍이는 일은 없었다. 사실 속으로는 두려워서 울고 싶었을테지만. 이내 창문 아래에서 아까 그녀가 집어던진 묵직한 의자가 가시덤불에 휘감긴 채로 올라왔다. 아서는 그녀를 그 의자에 가벼이 앉혀주었다. 베로니카는 괜한 의자 손잡이를 꼭 잡은 채, 제 앞에 앉은 에드워드를 노려보았다.


 "다시 한 번 소개하지. 이제 인간인 체 하는 것도 필요 없겠군. 네가 생각한 대로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네가 우리의 진짜 이름을 알 필요가 없으니 그냥 에드워드라고 부르도록. 이쪽은 알겠지. 안토니 젠킨스다. 네 옆은 아서 크로포드. 그럼 이제 목적인가."

 "당신들이 뭘 하건 간에 협조해 줄 생각은 없어."

 "협조를 구할 거였으면 애초에 납치하지도 않았다. 잘 들어라. 너는 그냥 장난감이다. 베로니카 페르디난드.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우리의 유혹에 잘 버텨내는지 궁금해졌고, 우연히 눈에 띈 널 데려온 것 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탈출은 꿈 깨라. 어디에 있던지 우리는 널 찾아낼 수 있어."


 절망과 절망만이 전해져오는 말이었다. 베로니카는 금방이라도 흐를 것 같은 눈물을 꾹 참고, 에드워드와 안토니, 아서를 차례로 노려보았다. 연옥색 눈동자에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 눈물 뒤로 적개심과 증오심이 가득했다. 잠시 의자 손잡이를 꼭 잡고 분을 삭이는 것 같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있던 물컵을 쥐고 그 안의 물을 에드워드에게 끼얹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의 표정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그녀의 화를 더 돋구었지만. 베로니카는 잠시 가쁘게 숨을 내뱉다가, 이를 악다물었다.


 "맘대로 해봐! 절대로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는 안 움직여! 지옥에나 떨어져라!"


 날카롭게 소리지른 그녀는 달음질쳐 자신이 아까 있던 방에 들어가버렸다. 에드워드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대충 손수건으로 훔쳐내었다. 안토니가 키득거려 웃으며 턱을 괸 채 입을 열었다.


 "제법 재미있을 것 같지? 에드워드의 화를 돋굴 수 있는 인간이라니 최고잖아."

 "저건 연약해, 에드워드, 안토니."

 "... ...그렇다고 해서 적당히 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베로니카에게 있어, 달콤하기 짝이 없는 지옥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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