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카렌] 졸업식
데이몬 고교의 학생들은 언제나 교장의 연설은 필요 이상으로 너무나 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3년의 종지부를 찍는 오늘까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또 예외인 것이 오늘의 연설은 평소보다 훨씬, 두서너배 정도는 길었기 때문이다. 교장은 무엇이 그리도 신난 것인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잔뜩 늘어놓으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많은 아이들의 분노를 불러왔음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이리라. 무사시는 주변을 살짝 돌아보았지만 연갈색의 머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어딘가에 앉아있는 것이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음 한 켠에 피어난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카렌 사에몬사부로 로쉴드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사고"를 당해 오른 발목을 크게 다쳤다. 의사들은 모두 입을 모아 앞으로는 뛸 수도 없고 휠체어를 타지 않고 목발만 짚고 산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카렌은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그녀는 결국 목발을 대체할 지팡이를 들고 제 홀로 걸어다녔다. 가끔은 경기에 나가 뛰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교장의 무한히 이어질 것 같은 연설에는 견딜 수 없었던 듯 자리를 비우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발목이 욱신거렸다. 이 발목만 아니었다면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또다시 들어, 그녀는 제 발목을 노려보았다. 문득 그녀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살몃 들었다. 진푸른색 눈동자 속에 그녀를 바라보던 사내가 담겼다. 카렌은 눈꼬리를 살풋이 휘어 웃어보였다. 무사시는 그 미소에 자신도 모르게, 마주 답하듯이 웃어보였다. 봄꽃마냥 수줍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교장의 훈화는 그러고도 한참을 이어졌다. 30분인가를 더 따분하게 보냈을까, 드디어 학생회장과 학생부장 선생님이 수많은 졸업장들이 쌓인 쟁반-사실은 쟁반이 아닐테지만 쟁반처럼 생긴 탓에 모두들 쟁반이라고 불렀다-들을 들고 올라왔다. 한 명씩 이름이 불렸다. 아, 무사시는 작게 탄성을 흘렸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오늘이 끝이구나. 오늘이 지나면 이제 더 이상 학교에 오지 않는구나, 학교에 와서 볼 수 없구나. 그런 생각이 나서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긴 연갈색 머리카락이 그의 진갈색 눈동자에 담뿍 담겼다.
"히루마 요이치."
익숙한 이름이 불려, 그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노란 머리의 익숙한 뒷모습이 단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오늘만큼은 그래도 조용하군, 무사시는 그렇게 생각하고 가볍게 픽 웃었다. 그렇지, 이제 저 녀석과도, 쿠리타와도 작별이구나. 그런 생각에 조금은 침울해지는 그였다. 중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지금까지의 19년 중에서 고작 4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라 할 수 있겠지만 정말로 중요한 시간들이었다.
카렌은 숨을 가다듬었다. 히루마의 이름이 불렸으면 곧 제 차례일 것이다. 괜시리 긴장이 되었다. 다른 이들이 보는 것이 긴장되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가 보는 것이 긴장되었다. 3년 내내 잘도 숨겨온 감정이-히루마가 듣는다면 비웃을 생각이었다-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툭하고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그냥 고백하는 건 어때, 라는 말을 여러번 들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이대로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무사시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에게 압력이나 압박을 주고 싶지 않았다. 4년동안 함께하며 화나는 일도 즐거운 일도 슬픈 일도 함께 겪었다. 그 동안의 시간을 날리고 싶지 않아서 제 감정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잠시 생각하고 있자니, 앞에서 제 이름이 불렸다. 카렌은 조금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역시 보고 있으려나, 아니, 관심 없을수도 있어. 그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위 학생은 데이몬 고교 3학년 1반의 부반장으로써 1년 간 반장-참고로 반장은 방금 불렸던 히루마였다-을 도와 반을 이끄는데 큰 일을 했으므로 이에 상을 표창함. 뒤로 돌아서 학생들에게 인사하세요."
카렌은 고개를 가벼이 까딱이곤, 지팡이를 팔에 건 채 뒤로 돌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찰나에 자신을 바라보며 박수를 치고 있는 무사시가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방금까지는 인식하지 못하던 심장소리가 쿵쿵대며 사방으로 들리는 것만 같았다. 단상에서 어떻게 내려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조금 허둥거리며 내려와, 자리를 찾아 헤매는 걸 히루마가 팔을 잡아당겨 겨우 1반의 앞쪽에 놓인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여기 선생님 자리잖아."
"어차피 반에 가서 농땡이 피우고 있을 거. 망할 여왕에게 누가 감히 일어나라고 하겠어. 그냥 앉아."
그 뒤로 작게 이어지는 키들키들 소리에 카렌 역시 작게 웃어버리곤 지팡이를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었다.
무사시는 의자에 앉은 카렌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히루마와 카렌이 연애적 의미로 친밀하지 않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둘은 서로를 제 3의 성별로 지칭하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1반이었으면, 내가 같은 반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머리를 복잡하게 엉클어, 무사시는 한숨을 푹 내쉬고 머리를 헝클었다.
각 반의 반장과 부반장만 표창하는데도 30분이 걸렸다. 강당에 있는 학생들은 전부 죽을상을 하곤 입술을 댓발 내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교감선생님은 20년간 재직하면서 교장선생님의 길디긴 훈화를 듣는데 지긋지긋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훈화를 단 세 문장으로 끝내고 학생들을 반으로 돌려보냈다.
무사시의 담임 선생님은 꽤나 활력과 열정이 넘치는 청년 선생님이었고, 그는 이런저런 인생 이야기를 해 주느라 다른 반보다 종례를 늦게 끝내주고야 말았다. 무사시는 속으로 이를 갈며 졸업장과 이런저런 상들, 선물들을 가방 속에 쓸어넣은 채 밖으로 반쯤 뛰쳐나왔다. 복도에서는 데이몬 데빌 배츠 후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은 급했지만 이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조각 케이크를 받고-케이크와 따로 포장된 슈크림은 분명히 마모리의 것이겠지. 무사시는 작게 웃었다-축하를 받았다. 꽃다발이 안겨졌다. 히아신스였다.
"다른 애들은 축하해줬어?"
"네, 히루마 선배랑, 쿠리타 선배랑, 카렌 선배까지 했어요. 이제 유키미츠 선배랑 마모리 선배 반에 가보려구요."
"아, 그럼 혹시 다들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이런 단순한 질문마저 긴장되는 그였다. 2학년들은 잠시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히루마 선배는 바로 갔고, 쿠리타 선배는 밖으로 나가는 걸 봤고...카렌 선배는 반에 있겠대요."
알고 있구나, 무사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1반 쪽으로 향했다. 6반인 그와는 반이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복도에는 졸업을 한 친구들과 그를 축하해주는 후배들, 부모님들, 친구들이 가득했다. 평소라면 3분도 안 걸려서 갈만한 거리였지만 지금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말 없이 가기만 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타케쿠라!"
이럴 줄 알았지, 무사시는 뒤를 돌았다.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가, 휴학하다 돌아온 터라 눈에 완전히 익지는 못한-사실은 계속 히루마들과 몰려다녀서 눈에 익을 새가 없었던 거겠지만-남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나 기억해? 작년에 같은 반이었잖아. 이야, 그때 참 즐거웠지~"
마지막이라는 것은 잊고 있던 추억마저 끌어온다. 무사시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다 벗어났지만 3발자국도 채 가지 못해 붙들리는 것을 반복했다. 벌써 몇 분 정도 지났을까, 점점 더 초조하기만 했다.
결국 어떻게든 도착한 3학년 1반 교실은 거의 다 비어있었다. 안에 있다고 했는데, 무사시는 조금 초조하게 안을 둘러보았다. 히루마야 당연히 없을 것이고-십중팔구는 부실에 있을 터였다-카렌마저 찾을 수 없었다. 다급해보이는 그의 모습에 반에 남아 있던 자그마한 여학생이 말을 걸었다.
"저기, 누구 찾아?"
"아, 그, 카렌...을."
"사에몬사부로 말하는 거지? 방금 나갔는데, 나간지 얼마 안 됐어. 우는 것 같던데."
우는 것 같았다는 말이 그의 마음 한 켠을 세차게 할퀴었다. 무슨 일인걸까, 누굴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 온걸까? 그게 나였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없겠지. 하는 마음이 가득해져서 무사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히루마라면 부실, 쿠리타 역시 부실. 하지만 카렌은 어디에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부실에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울면서 부실에 갈 애는 아니니까. 화장실에 숨어서 울 것 같지도 않았다. 혹시나 싶어 그 곳으로 발길을 옮기는 무사시는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만약 카렌에게 좋아하는 애가 있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서지 않았다. 무사시는 단추가 하나 빼고 전부 다 떨어져 나가 너덜거리는 제 와이셔츠를 내려다보았다. 유일하게 매달려 있는 두번째 단추는 제 주인이 누구냐는 듯이 빛을 내었다.
1학년 2반 앞의 복도는 조용했다. 이곳에 없는 걸까, 무사시는 조심스레 문을 잡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가 잡으려는 순간 문이 세차게 열린 까닭이었다.
"...카렌."
"...아, 무사시."
카렌의 진푸른색 눈동자에는 눈물방울이 맺혀있었다. 눈물이 흐른 자욱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눈물이 맺혀 있다는 것 자체가 무사시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싶어져 자신감이 사라졌다. 이 단추, 단추 하나만 전하면 되는 건데.
카렌의 교복 마이에는 단추가 남아있지 않았다. 무사시는 잠시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서 있었다. 카렌은 손을 들어 눈물을 대충 닦아내곤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갈게."
이 다음의 행동은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반쯤 무의식적으로 한 것이었다. 무사시는 제 와이셔츠로 손을 가져가 두번째 단추를 뜯어내고 그것을 카렌에게 내밀었다. 카렌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주고 싶었어."
연습한 것처럼 매끄러운 말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카렌은 잠시 우물쭈물해하는 것 같다가 단추를 받아들었다. 이제는 제가 갈 차례였다. 무사시는 손을 살짝 흔들어보이고 뒤를 돌았다. 3년만에 전한 감정이었다. 분명 거절당하는 결말이라 하더라도 후련했-...어라. 무사시는 자신을 잡는 손길에 뒤를 돌았다. 카렌의 눈동자에 눈물이 잔뜩 맺혀 있었다.
"저기, 그, 음, 그렇게 부담스럽거나 하면 다시 줘도 돼.."
말이 끝나기 전에 카렌이 손을 내밀었다. 역시 거절이구나. 무사시는 애써 눈물짓지 않으려 하며 손을 뻗어 무언가를 받아들었다. 동그랗고, 검게 빛나는 그것은 단추였다. 하지만 무사시의 단추는 아니었다. 마의 단추. 무사시는 놀라 카렌을 바라보았다. 카렌의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이 가득 어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 좋아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3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된 답이리라. 무사시는 대답 않고 그저 카렌을 꽉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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