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왕비티 망애증후군
소파에 느른하게 앉아있던 검은 머리의 청년이 제 맞은 편에 앉은 중년의 사내-블라드-에게 말을 걸었다. 우아한 찻잔 속의 붉은 찻물을 바라보던 사내가 푸른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요즘 무슨 별 일은 없었어, 버서커?"
"요 전날, 금발머리 아가씨랑 만난 적이 있었네만."
"하루에 만나는 사람이 몇인데 그걸 다 기억해?"
"아니,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되어서. 날 기억하는 것처럼 말하더군."
"착각이겠지."
"분명 그럴테지, 마스터. 내가 이 땅에서 아는 인간은 자네 뿐이니 말이야."
--
"안녕, 좋은 점심이예요!"
"퍽 붙임성이 좋군. 하지만 방해다. 이렇게 말을 계속 거는 것도 대단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슬슬 그만두어줬으면 하는데."
햇살이 퍽 따사로운 오후. 길을 걷고 있던 금발의 중년 사내, 블라드에게 퍽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금발의 여성이 있었다. 블라드는 여성의 인사를 받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 한숨을 작게 쉬곤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옆에서 그저 흘러가는 보는 이들마저 흠칫하게 할 정도로 차가운 시선이었으니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그녀에게는 꽤나 상처였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활짝 웃어보일 뿐이었다. 블라드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고 그녀에게 향해있던 시선을 떼어, 조금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은발의 노신사를 바라보았다.
"네 마스터의 시중을 내가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만, 아쳐. 제대로 간수하는 게 좋을텐데. 성배전쟁 중 죽는 마스터가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너도 알 거라고 생각한다."
"그야 당연히 나도 알고 있네, 버서커 군. 하지만 마스터께서는 그저 네게 인사하고 싶은 것 뿐이시네."
아니, 그렇지 않아. 마스터라 불린 여성-베아트리체-는 왠지 핑 도는 것 같은 눈물을 억지로 꾸욱 눌러참고 더 환히 웃어보였다. 하지만 블라드의 시선은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 싸늘함이 '그 날'부터 줄곧 느껴오던 한기에 더해졌다. 아아, 추워. 베아트리체는 결국 시선을 떨어트리고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럼, 또 봐요, 버서커."
"아니, 사양하도록 하지."
버서커는 차갑게 대답하곤 손에 들고 있던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뒤를 돌아 아쳐에게 돌아오는 그녀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쳐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뒤를 돌아, 얼굴이 블라드에게 보이지 않도록 걷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녹주석같은 눈물방울이 떨어져내려 뺨에 어룽졌다.
그녀와 그들은 지난번 성배전쟁에서 만나 서로의 인연의 실을 묶어두었었다. 붉은 실 세 가닥이 모여 하나. 그런 말을 하며 좋다고 까르르 웃어대곤 했다. 하지만 실 한 가닥이 손을 빠져나갔다. 베아트리체는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었지만 그럴 수록 손만이 점점 더 젖어들어갈 뿐이었다. 물에 젖어버린 태양은 더 이상 자신을 태워 빛을 낼 수 없었다.
태양의 주변을 돌던 달 하나는 빛을 외면하며 멀어졌다. 태양은 더 이상 빛을 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이었다. 남은 달 하나는 애설픈 듯 태양빛을 갈구했지만 이미 젖어버린 태양은 불을 일으킬 수 없었다. 태양은 왕관을 내려놓고 체스판에서 걸어나왔다. 흑의 나이트가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었고, 백의 나이트는 그것을 보았으되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성배전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격렬해졌다. 지난 번과 같았다. 영령이 스러지고, 마스터들이 죽었다. 말로 하기 힘들 정도로 잔혹하게 처리된 마스터들도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제 손등 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에 사무치는 듯한 외로움이 가득했다. 왼손 손등에는 영주가 있던 흔적이 흐릿했고, 오른손의 영주는 아직 3획이 전부 남아 있었다. 두 영주의 모습이 서로 달랐다. 베아트리체는 왼손을 들어 제 눈물을 훔쳤다. 아쳐가 방에 들어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입술을 악물었다. 마지막 수를 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것 참, 마지막으로 검을 나눌 상대가 겁쟁이 아쳐라니. 내 상대로는 여러모로 부족하지 않은가."
"블라드, 자네는 언제나처럼 오만하군. 이 몸은 겁쟁이가 아니라 신중한 것 뿐이라네. 그 신중함이 지금까지 나를 마스터 곁에 남게 해 주었지 않은가."
아쳐는 그렇게 말하며 제 한 발 뒤에 선 그의 마스터, 베아트리체를 바라보았다. 베아트리체는 평소에 늘상 지어주던 환한 미소를 잃은 채 조금은 떨리는 듯한 미소를 억지로 입꼬리에 매달아 머금고 있었다. 무엇을 그리도 고민하고 있느냐. 지금이라도 그 다정한 말이 귓가에 들려올 것만 같았다. 진실로 들려온 것은, 진실로 느끼는 것은 차가운 눈빛과 한숨 뿐이었지만. 그 순간 베아트리체는 마지막 수를 결정했다.
'버서커, 이제 남은 것은 너와 아쳐 뿐이야. 하지만 저 여자는 본래 강력한 마법사로 더 유명하다. 그러니 노릴 수 있으면 아쳐의 마스터다!'
저 멀리에서, 아마도 이 곳이 잘 보일 창고 위에 올라가 있을 버서커의 마스터가 전음을 통해 전해오는 말이었다. 블라드는 고개를 끄덕여보였고, 베아트리체는 당연하단 듯 경계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 눈에는 약간의 안타까움과 애정이 섞여 있어 블라드를 더 짜증나게 만들었다. 어설픈 위로와 어설픈 애정이 가장 아파왔다. 자신에 대해 아는 것도, 간단히 이름 하나도 알지 못하는 이가 무슨 애정이고 무슨 안타까움이냔 말이다. 블라드는 그녀에게 약간의 증오마저 느끼고 있었다.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며 상대를 헤집지. 뒤에 남겨진 상처는 생각하지 않으며. 알지 못하면서 까불지 마.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증오심을 불태웠다. 그 어둠은 그를 갉아먹고 점점 커졌다. 태양빛은 어둠을 뿌리치지 않았다. 아니-
"피로 얼룩진 나의 인생을 여기에 바치노라, 카지클 베이!"
뿌리칠 생각이 없었다. 선혈이 바닥에 선명하게 튀었다. 붉은 피가 말뚝을 타고내려,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어째서? 블라드는 망연해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타오르는 것 같던 화염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그녀가 없앴다. 어째서? 어째서 막지 않았지? 그녀는 강한 마법사였다. 그것은 그녀를 모르는 그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아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녀가 강한 마법사라는 것을 어째서 알고 있지? 블라드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피를 뚝뚝 흘리며, 간신히 서 있었다. 숨결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가냘팠다. 그녀의 고개가, 서서히, 서서히 움직여서 결국 한참만에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미소는 그가 평소 늘 외면하던 것과 같던, 환한 태양빛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외면할 수 없었다. 그 미소를 보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쳐, 아쳐는? 그제야 그에게 생각이 미친 블라드는 시선을 들어 아쳐를 바라보았다. 아쳐와 그녀를 잇고 있는 얇은 흰 선이 보였다. 저 실로 그에게 마력을 주입하고 있는 것이겠지. 마지막 마력까지 짜내고 있는 것일까, 아쳐의 모습은 아까와 그대로였다. 아쳐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을 소리없이 흘려내고 있었다. 블라드는 뒤통수를 크게 맞은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다시 베아트리체에게 향했다. 그의 메마른 입술이 가까스로 떨렸고, 이내 열렸다.
"...베아, 트리..체..."
"...응."
꺼질 듯 희미한 목소리가 답으로 다가왔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이런 건 네 목소리가 아니야. 어째서 내가 이런 것을 알고 있지? 그녀의 이름을, 그녀가 평소가 어떻게 웃고, 어떻게 말하는지를 기억하고 있지? 어째서? 피가 한 방울 바닥을 물들일 때마다 그의 머릿속에 기억이 한 방울씩 되돌아왔다. 벌려진 블라드의 입술 사이로 짐승의 그것 같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신음소리를 압도하는 작은 속삭임이 있었다. 바로 앞에서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것 같은 그 목소리는 블라드의 귓가에는 아주 생생하게 도달했다.
"네가, 그, 전승을, 쓰는, 것은...싫, 어하잖, 아. 그렇, 지."
그 미소가 태양빛과도 같아, 결국 블라드는 눈물을 툭툭 떨어트렸다. 안돼, 안돼. 힘없는 말은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주지 못했다. 블라드의 손이 뻗어나갔다. 하지만 닿지 못했다. 태양은 빛을 잃고 무너져내려 먼지로 스러져버리고야 말았다. 그가 좋아했던, 그가 선물했던 흰 블라우스는 온통 붉게 얼룩이 들어 버렸다. 땅에 가만히 누운 그녀는 여태까지 중 가장 작았다. 아쳐의 모습은 어느새 반 이상이 사라지고 없었다. 블라드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쳐는 고개를 가만히 들었다. 그의 시선에는 그저 안타까움만이 가득했다.
"그건 비티의 선택이었어."
블라드는 결국, 홀로 남아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기억의 편린들에서 혈향이 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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